벼르고 벼르던 영화 '동주'
IPTV의 VOD로 올라오고 나서야 보게 되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시절부터 장난스레 끄적이던 시.
그러다가 중학교 올라가서 계단 벽에 커다랗게 붙어있던 동주의 '서시'를 읽었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그 짧은 시가 어찌 그리 아프고 쓰리던지,
중학교 1학년의 어린 나이에 그 시의 깊이를 어찌 알고 그리 가슴이 아프던지...
그 뒤 윤동주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찾아 읽었다.
읽을수록 동주를 이해하기 힘들었고,
읽을수록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그리고 기억속에 동주가 희미해져 갈 무렵, 다시 동주를 영화로 만났다.
세상을 사랑하여 변화시키려던 사촌이자 절친인 몽규는,
동주의 시를 사랑하고 동주를 사랑했다.
영화속 장면 장면 나타나는 펜촉의 서걱거림은
중학교 시절 그 소리가 너무 좋아 펜촉에 잉크를 찍어 시를 쓰고 일기를 쓰던 내 모습이 떠 올랐고,
만년필을 들어 기차 안에서 시를 적는 동주의 모습에서
잉크병을 들고다니지 못해 큰맘먹고 구입했던 만녀필을 들고 좋아하던 중학생의 나를 만났다.
자신의 길을 가면서도 동주에게 계속 시를 쓰라 권유하는 몽규의 모습에서,
내 시를 읽어주고 좋아해주던 절친의 미소가 떠올랐고,
교토제대에 낙방하여 씁쓸해 하는 동주의 모습에서 번번이 대학입시에서 좌절하던 나를 만났다.
영화를 보며 감히 동주와 나를 비교하고 감정이입하는 부끄러운 내 모습을 보며,
잊혀진 줄 알았던 동주를 향한 깊은 애정이 아직 나에게 남아 있음을 느끼고,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영화를 보며 다시금 시를 써 볼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동주는 시가 쉽게 써졌다는데
나는 힘들게 시가 아닌 시를 쓰고 있는게 힘들어
끄적거렸던 1990년 어느날의 습작노트를 꺼내 읽어보고 만다.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중략>...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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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아닌 시
시가 써지지 않는다
밖에는 올 봄 들어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봄비가 내리고
이 비가 그치면 맑은 하늘이 나올 터이고 시원한 바람, 씻겨진 잎사귀
이 많은 시들을 만나며 어느 하나도 시로 옮길 수 없다.
상투적이고 일반적인 나의 감상 그 감상을 늘어놓기만 할 뿐
내 시는 시가 아니다. 난 시를 쓰고 싶어 시를 쓰지만 역시나 나의 시는 시가 아니다
(1990.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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