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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믿음이 구원하였다 (마 9:14~26)

by 멧풀다솜 2019.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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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궁금하였을 것이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자신들의 스승이 인정하고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까지 했을까? 한편으로는 경계심과 질투심도 들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스승인 세례요한이 메시아인줄 알았는데, 선지자인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몰려가니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그런데 금식을 하지 않는다? 맛있는것도 먹고, 포도주도 마시고 그런다. 요한은 석청과 메뚜기를 먹는데?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었다. 바리새인도, 자신들도, 금식을 하는데 어찌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가? 이에 예수님은 금식할 이유가 없다 말씀하신다. 이미 그리스도가 왔는데 왜 슬퍼하고 금식해야 하는가?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 율법에 얽매이는 시대가 끝났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치신 율법의 새로운 적용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만을 강조하고 지킬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질을 파악하고 의미를 파악하여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새 가죽부대인 것이요, 새 포도주는 예수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때 한 관리(회당장 야이로 / 막5:22~23)가 와서 요청한다.

 "내 딸이 죽게 되었는데 와서 손을 얹어 주시면 살아나겠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딸을 살려주기 위하여 길을 나서시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며 함께 움직인다.


 가는 도중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뒤에서 겉옷자락에 손을 댄다. 예수님은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는가 물으시니 제자들이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그것을 어찌 알겠느냐 대답하지만 옷자락에 손을 댄 것으로 병이 나은것을 알게 된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이 그랬음을 고백한다. 이에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신다. (막5:22~34)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신 예수님. 사람들이 예수님과 야이로를 보고 야이로에게 이미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을 그만 힘들게 하시라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게 아니라 자는 것이라 말씀하시고는 장례를 준비하고 애도하는 사람들을 내보내신 후 야이로의 딸을 일으켜 세우신다.


 혈루증으로 인해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지도 못할 뿐더러 손만 살짝 닿아도 율법에 의해 함께 부정해지기 때문에 마을 밖에 있어야 하는 이 여인은 어떻게든 병을 고치려 하였고, 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예수님도 모르게 살짝 옷을 만지는 것이었다.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의 옷을 만지면 병이 고쳐질 것이란 믿음보다는 예수님이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는가 물으실 때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해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믿음이었다. 그냥 우연의 일치로 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제자들이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그걸 어찌 아느냐 불평할 때 모르는 척 자리를 뜰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혈루증을 앓고 있는 부정한 여인이 감히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온 것도 잘못인데 심지어 예수님의 옷을 만지다니....

 하지만 이 여인은 모른 척 할 수 없었고,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고백하고 단순한 병고침이 아닌 구원을 얻게 되었다.


 회당장이었던 야이로는 예수님에게 그냥 자신의 딸을 살펴달라 요청해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손만 대면 살겠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의 요청에 답하셨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하면 말씀으로, 손만 대면 낫겠다 하는 사람에게는 손을 대시고...예수님의 사역의 방식은 일방적이지 않다. 예수님의 방식대로 밀어 붙이는 방식이 아닌 소통하고, 가능하면 원하는 대로 해 주신다.


 우리의 믿음은 맹목이 아니고 일방적인 기도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 소통하고, 예수님과 소통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데서 나온다. 일방적으로 우리의 요구를 요구하는 기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론 말씀으로, 때론 찬양으로, 때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그냥 짠~ 하고 구원하시는 방법을 원하지 않으신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실 때에도 그러하였고,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고, 대화하시며, 그 가운데서 순종을 보이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믿음이 구원한다.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믿음이 구원받는게 아니라, 인격적으로 소통하고, 하나님의 능력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


 내 믿음이 미신이 되지 않도록, 그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생각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내 소원을 아뢰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그렇게 하나님 앞으로 매일 한걸음씩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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