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QT)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 9:1~13)

by 멧풀다솜 2019. 2. 1.
728x90



가다라 지방에서 다시 배를 타고 돌아오신 예수님은 한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함께 있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뉘인 채 들고 예수께로 가서 고침을 받고자 했지만, 사람들이 워낙에 운집해 있어 그들은 지붕을 들어내고 줄을 달아 내려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놓았다.(눅 5:18~26)


 예수님은 환자를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께로 데려가 고침을 받으려는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 가족인지, 친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께 환자를 데려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고, 그 의지는 예수님이 반드시 고쳐주실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에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향해 황당한 말씀을 하신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함께 있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밖에 없는데 이는 신성모독이라며 수근거리자 예수님은 또다시 황당한 질문을 던지신다.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하는 질문이다.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다. 일어나 걸으라고 하는 말이 쉽다고 한다면 그런 예수님과 같은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말이 된다. 죄사함이 쉽다고 한다면 이는 신성모독이 된다. 함부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사실 죄사함을 받았다 말하는게 더 쉽다.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는 말은 당장 눈앞에 보여지기 때문에 거짓인지 아닌지 들통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쉬운 듯 보이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말,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는 신성모독이 아닌가 하고 참람하다 생각할 때에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시자 중풍병자는 일어나서 자기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죄사함의 권세가 실제로 구현되는 것을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배신자요, 매국노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신다. 그러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앉아 식사를 하자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어째서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리는가를 트집잡는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건강한 사람에게 무슨 의사가 필요하겠느냐며 호세아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라 대답하신다.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중풍병자도, 세리도, 그 밖의 다른 죄인들도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으니 이는 '긍휼'이다. 이들은 죄사함에 대한 간절함, 치유에 대한 간절함이 있다.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간절함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긍휼을 원하고, 예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이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 정말 내 삶에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예수님의 간섭하심을 원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지붕을 뚫고서라도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간절함. 그 간절함이 오늘 나에게 필요한게 아닐런지....



728x90

'묵상(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5장 8절  (0) 2019.02.01
욥기 23장 10절  (0) 2019.02.01
두려움 (마 8:23~34)  (0) 2019.01.31
무엇을 위해서? (마 8:14~22)  (0) 2019.01.30
백부장 (마 8:1~13)  (0) 2019.01.2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