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마 22:34~46)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에서의 난동(?)사건 이후,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때 소위 말하는 율법(하나님의 말씀)의 전문가들이 총 동원되어 예수님과 논쟁을 벌였다.
첫번째는 제사장과 장로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삼아 사람들의 지지를 무너뜨리려 하였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반문에 대해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치를 떨 뿐이었다.
두번째는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세금에 관해 질문하였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상태를 이용하여 세금을 내라고 하든, 내지 말라고 하든 정치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공격할 빌미를 얻고자 했으나 "가이사(카이사르)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세번째로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관해 논쟁을 벌였으나 역시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이기기는 커녕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탁월한 가르침에 놀라게 만들고만 말았다.
바리새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궁리를 하여 예수님을 찾았다. 이번에는 그들 가운데서도 율법에 대해 정통하다 여기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이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질문한 것은 많은 율법들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큰 계명인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을 가르치는 랍비들이나 유대학파(바리새파, 사두개파 등)들은 가르치는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들이 있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든 공격의 빌미가 된다.
첫번째로는 다른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고, 두번째로는 다른 하나님의 율법을 경시했다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도 간결하고 명확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쉐마'라고 하는 율법을 적어 작은 통에 담아 손목에 매고, 이마에 붙이고, 집 문에 기록하였는데 이는 마음에 새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5절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이었다.
신명기 에서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고 되어 있어(신 6:5~9)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이것이 가장 크고 위대한 계명이라 말씀하시며, 이어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같은 맥락이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이야 말로 가장 크고 위대한 계명이라 답하셨다.
예수님과 논쟁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도, 제사장도, 사두개인들도 이 말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순 없었다. 이미 그들의 손목에도, 이마에도, 집 문설주에도 같은 말씀을 매고 붙이고 새기고 있으니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이제 예수님이 오히려 질문을 던지신다.
"네희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은 너무 쉽다는 듯 다윗의 자손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하였으나 예수님은 이에 다윗의 시인 시편 110편을 인용하시면서 다윗의 자손이라면 어찌 다윗이 자신의 자손에게 '주'라 불렀겠느냐 물으신다.
바리새인 율법학자와의 논쟁을 끝으로 모든 논쟁이 종결되었다. 이후로는 아무도 감히 예수님과 율법으로 논쟁을 벌이려 하지 않았다. 논쟁을 해 봐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 누구도 말씀으로 예수님과 논쟁하여 이길수는 없다. 그러나 단순하게 예수님이 말씀 그 자체이기에 논쟁에서 이긴것은 아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밀리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예수님의 "행함"에 있지 않았을까?
제사장과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은 모두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지식을 뽐내고, 논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권위를 세우려 하였지만 예수님은 삶으로, 실천으로 말씀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감히 대답할 수 없었지 않았을까?
나도 참 논쟁을 좋아하는 기질이다. 철없던 시절에는 길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몰몬교 선교사들을 만나면 아주 신이나서 그들과 논쟁하기를 즐겨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교만이 숨어있다. '나만큼 알고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해. 내가 옳고 너는 틀려' 하는 마음이 숨어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단하다고 여겼던 지식들이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 앞에서는 사실 얼마나 가치 없고 보잘것 없는 것들이었는지 드러난다.
알려고 하기 보다는 살아내려 애쓰자. 논쟁을 하려 하기 보다는 사랑하고 기도하며 삶으로 보여주자. 크게 생각할 것 없이 오늘 내게 주어진 학생들, 동료교사들, 가족, 이웃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 애쓰는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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