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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은밀하게 침투하는 죄 (삼하1장~11장)

by 멧풀다솜 2016.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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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오랜만에 올리는 묵상글입니다.

사무엘하 1장부터 11장 까지는 참으로 흥미 진진하면서도, 내 신앙을 돌아보게 하는 내용들이 있어 묵상하기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

이스라엘 모든 왕들의 기준이 되는 왕,

그런 다윗의 유일한(?) 범죄이자 다윗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죄,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다."


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슬픔

사울이 죽었다.

다윗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죽이고자 하던 그 사울이 아들 요나단과 함께 허망하게 죽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이었고, 도우심이었고, 계획하심이었다.

그것을 믿었기에 다윗은 사울을 죽일 몇차례의 기회도 그냥 보냈다.


그런데 다윗의 반응은 기쁨도, 감사도 아닌 슬픔이었다.

사울과 요나단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부르고 그 노래를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한다.

다윗은 참으로 변죽도 좋은 사람이다.


2.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사울이 죽자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되고,

북이스라엘에서는 사울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이었던 이스보셋을 세워 왕으로 삼는다.

그 뒤로 이스라엘과 유다는 길고도 지루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삼하 3:1)


길고 지루한 전쟁 가운데 유다는 점점 강성해 지고, 이스라엘은 점점 약해져만 간다.


3. 아브넬의 배신과 죽음

그러던 중 아브넬은 이스보셋과의 갈등이 생기게 되고, 이로 인해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가 투항한다.

단지 자신의 몸만 투항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를 다윗에게로 보내겠다 한다.


아브넬은 다윗을 집요하게 쫓던 사울의 군대장관이었으며,

사울이 죽자 발빠르게 이스보셋을 세워 왕국을 분열시킨 장본인이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 없이 통일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옳다 여겼고,

그래서 아브넬을 받아들인다.


문제는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게서 터졌다.

요압은 아브넬에게 다른 계략이 있다 주장하고 결국 이스라엘로 돌아가던 아브넬을 불러들여

다윗 모르게 아브넬을 살해하게 된다.

요압은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준익 아브넬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것은 결국 아브넬을 죽이는 구체적 행위에 이르게 된다.


4. 다윗의 분노와 저주, 그리고 포용(?)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심히 분노한다.

전쟁 없이 통일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기대가 무너졌고,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것을 체험적으로 굳게 믿는 다윗에게

요압의 사사로운 복수는 악한 행위였다.

다윗은 아브넬을 위하여 슬퍼하고 요압을 하나님이 그 악행대로 갚으실 것이라 저주한다.


(의문점)

다윗은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옷을 찢고 베를 띠고 금식을 하며 애통해 한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에게도 그렇게 하라 명령한다.

도대체 왜?

다윗의 슬픔과 분노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사울이나 요나단과 달리 아브넬은 신하의 신분이며 일개 장수일 뿐이다.

그럼에도 온 백성에게 옷을 찢고 베를 띠고 애도를 하도록 명령할 뿐 아니라,

직접 아브넬의 상여를 따라가며 울고 무덤 앞에서 곡을 한다.

그리고 의미 있는 구절이 나온다.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삼하 3:37)


결국 다윗의 아브넬을 향한 과도한(?) 애도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결백함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던 것은 아닐까?

또한 그렇게 자신의 명령과 뜻을 어기고 악행을 행한 요압을 저주하지만 내치지는 않는다.

여전히 요압은 군대 장관직을 유지하고 있다.

다윗의 관용이 지나친 것인가?

다윗은 여전히 정치적 안정을 바라고 있고, 그래서 요압과 같은 군 통솔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이 다윗이 요압을 저주하지만 내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5. 통일왕국

이스보셋이 허망하게 살해되고, 결국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다윗은 다윗성, 곧 시온성을 차지하고 점점 강하여져 가며 블레셋과 같은 주변의 적들을 물리치며 빠르게 왕권을 다져간다.


6. 하나님의 궤를 옮기다

이제 다윗은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옴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건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려 삼만의 군사를 보내어 바알레유다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도록 한다.

그런데 참으로 황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수레에 법궤를 싣고 오는 과정에서 떨어지려 하는 법궤를 잡으려던 웃사가 그자리에 즉사한 것이다.

이에 다윗은 법궤 수송을 중단하고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오벧에돔의 집이 하나님의 궤로 인해 복을 받게 되었단 소식을 듣고 나서야 다시 법궤를 운반해 온다.

이번에는 소와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제사장들로 하여금 어깨에 메고 오도록 한다.

그리고 무사히 법궤는 다윗성에 들어오게 된다.


(의문점)

웃사는 도대체 왜 죽은 것일까?

성물에 손을 대지 말라는 규례 때문에?

만일 그렇다면 법궤를 수레로 운반하는 과정의 모든 사람과 소가 죽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웃사만?

떨어지려 하는 법궤를 잡은 죄로?


다윗은 급박한 상황중에도 언제나 하나님께 모든 일을 물어가며 진행했다.

그래서 다윗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구절은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오되~"이다.

다윗은 철저하게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묻고, 그 응답을 통해 일을 추진해 왔다.

그런 그가 무려 하나님의 법궤를 나르는 일을 임의로 처리한다.

평소의 다윗의 모습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다윗은 법궤 운반 보다는 법궤 운반을 통해 얻게 될 정치적 안정과 백성들의 지지를 원했다.

그래서 삼만의 군사와 화려한 악기들로 퍼레이드를 하며 하나님의 법궤가 다윗성에 들어오는 모습을 온 백성들이 보게 했다.

그런데 웃사가 죽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였다.

다윗은 원래의 규례대로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오지만,

모든 성물을 흰 천으로 덮고 초라하게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오는 것은 너무 초라해 보인다.

결국 다윗은 다른 퍼포먼스를 준비한다.

법궤를 여섯걸음 옮길 때 마다 살진 소를 잡아 제사하고 춤을 추는 것이다.

여섯걸음마다 소를 잡았으니 그날에 소고기의 양은 엄청난 양이 되었을 것이고,

왕이 베옷을 입고 어찌나 열심히 춤을 추었던지 미갈이 조롱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다르다.

백성들은 왕이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초라한 베옷을 입은 채 하나님의 법궤 앞에 기뻐 춤을 추는 모습을 본다.

쉴새 없이 소를 잡아 제사지내는 것을 본다.

그리고 마지막에 떡과 고기를 함께한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주니 다윗은 참으로 위대한 왕으로 각인된다.


다윗은 여전히 나라의 안정과 왕권의 안정을 신경쓰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사소한(?) 실수들이 나타난다.

하나는 요압을 용납한 것이며, 법궤를 임의로 옮기려 한 것이다.

하나님은 법궤 운반 과정에서 웃사를 죽임으로 다윗에게 경고를 보내셨다.


7. 이스라엘의 강성함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는 왕이 되었다.

이는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심이었다.

다윗은 주변 국가들을 정리하며 모든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이스라엘은 탄탄하게 성장해간다.

또한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왕자와 같은 신분을 주고 환대함으로 사울집안에 대해 전혀 복수할 의지가 없음도 보여주며 요나단과의 언약도 지키게 된다.


8. 다윗의 범죄

드디어 일이 터졌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고, 욕정에 사로잡힌 다윗은 밧세바를 불러 동침하게 된다.

밧세바가 임신 사실을 알려오자 다윗은 전쟁에 나가 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에게 휴가를 주어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유도하려 하지만 충직하고 고지식한 우리아는 자신의 상관과 동료들이 전쟁통에 있는데 어찌 아내와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느냐며 끝내 아내와 동침하지 않는다.

결국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중에 죽도록 하라는 서신을 우리아편에 들려서 요압에게 보낸다.

자신을 죽이라는 서신을 우리아는 충직하게 왕의 서신인지라 요압에게 전달하게 되고,

결국 우리아는 다윗과 요압의 계략에 의해 전쟁중 전사자로 처리되고 만다.


(의문점)

다윗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다.

그래서 였을까? 사무엘하 11장 1절에서 다윗은 홀로 예루살렘에 있게 된다.

모든 전쟁에 참전하고 승리를 했던 다윗이 부하 장수들은 전쟁을 하고 있는데 혼자 성에서 망중한을 즐긴다.

다윗은 왜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왕국이 안정을 찾게 되고, 백성들의 신망도 올라가자 더이상 자신이 일선에 나설 필요가 없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심을 타고 다윗의 눈에 밧세바가 보이며, 그 순간 다윗은 신앙도, 양심도 사라져버렸다.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다윗은 누구를 통해 죽이는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이 저주했지만 차마 내치지 못한 요압이었다.

그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것 보다 더 교활한 방법으로 다윗은 자신의 충직한 신하 우리아를 죽이게 된다.


하나님이 모든 이스라엘 왕들의 기준으로 삼았던 다윗의 범죄를 살펴보며,

다윗의 범죄는 아브넬 사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윗의 모든 관심은 나라의 안정, 왕권의 안정이었다.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던 시절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그의 관심이었지만,

힘든 시기를 지내고 나니 그의 관심이 변하였고, 그 관심의 변화는 죄의 틈을 만들게 되었다.

요압을 용납한 다윗은 법궤를 임의로 옮기려 하게 되고,

나라가 안정을 찾은 뒤에 부하들을 전쟁에 내보내고 자신은 성위에서 안정된 나라의 야경을 감상한다.

그리고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바라본다.

아마도 그순간 다윗의 마음에는 나라도 안정되었고, 권력도 안정되었는데, 왕의 권한으로 저 여인 하나 어쩌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죄는 순간의 방심을 타고 처음에는 죄처럼 보이지도 않는 작은 틈을 만들어둔다.

그리고 그 틈을 조금씩 벌이다가 결국 사고를 장학하게 되고 점점 더 교묘해지게 된다.


다윗이 이럴진대 내 삶의 죄의 틈은 얼마나 많을까?

아마도 온몸이 죄의 틈 투성이로 가득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죄의 유혹을 이기는 길은 단 한가지도,

관심과 시선을 하나님께로 두는 것.

그것이 죄의 유혹을 이길 유일한 힘일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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