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인정하는 것이다.
말씀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이단에 쉽게 현혹되기도 하고, 말씀을 지식으로만 습득하게 되면 교만해지고 자기 신앙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따라서 주일설교와 매일의 성경묵상(QT)을 통해, 때론 성경공부를 통해 말씀을 알아가고, 말씀에서 삶의 지혜를 얻어야 하며, 말씀을 통해 신앙을 성장시켜나가야 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알고 인정하는 것인데....문제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 쉽지 않을까? 왜 말씀묵상을 하려고 하면 잘 안되고, 성경공부도 지루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는 못하는가?
극단적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씀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말씀을 너무도 사랑하여 하루종일 말씀을 묵상한다 고백한다(97).
사랑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말씀을 사랑하는데 어찌 묵상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말씀을 사랑한다면, 즐거워한다면, 기뻐한다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하루 종일 묵상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가?
말씀이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며(98), 통찰력을 주고(99), 깨달음을 주며(100), 삶의 방향을 제시하여 주기 때문이다(101).
사람이 무언가를 사랑할 때, 첫눈에 반한다는 표현을 나는 믿지 않는다. 첫눈에 마음에 들고 좋아할 순 있어도 사랑할수는 없다 생각한다. 알아가고, 경험하고, 관계가 깊어질 때, 사랑이 생겨나고 깊어지는 것이다.
말씀을 처음부터 사랑하고 사모할 수 없는 이유이다.
말씀이 주는 경험이 없이 어찌 말씀을 사랑할 수 있을까?
시인은 매일의 묵상(97), 가까이 함(98), 깊은 고찰(99), 순종(100)으로 말씀을 경험해 나가고, 그래서 말씀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이다.(102)
사도요한은 창세기의 첫장의 표현을 빌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말씀과 예수님, 하나님을 하나로 보았다. 시편기자 역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친히 가르치신다 표현할 수 있는 이유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기 때문이다.
106절 이후로 시인은 자신의 말씀에 대해 사랑고백을 넘어 맹세로 이어진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만사형통으로 인함이 아님을 고백하고 있다.
시인은 여전히 많은 고통을 당하고(107), 죽음의 위협에 처해 있으며(109), 악한자들의 노림에 놓여있다(110).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의지하고 붙들 것이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고백하며, 맹세하고, 그래서 말씀으로 인해 또한 하나님을 찬양한다.(108)
매일 말씀묵상을 한다 하여도 습관적으로, 지식적으로 접근한다면 결코 이러한 시인의 경험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의 말씀 묵상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반성해야겠다.
지나치게 지식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은 아닌지, 정말로 말씀을 통해 오늘 하루의 내 삶의 방향을 잡고, 말씀에 순종하려는 노력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려 애쓰고 있는지를 점검하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경험하기 위해 한걸음씩 나아가야겠다.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꿀송이보다 단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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