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두 마음을 품는자(마음이 간사한 자)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113)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에 다리를 걸치고 필요한 데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어찌보면 참으로 지혜로와 보일 수 있는 이러한 행동양식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을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에는 이 세상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루하고 융통성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눅16:13)
시인은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방패삼고, 말씀을 바라봄으로 소망을 얻으려 하고 있다.(114) 그와 동시에 시인은 이러한 행악자들에게서 발걸음을 옮겨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리라 다짐한다.(115)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소망이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116)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금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두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것이며, 세상에서 지혜롭게 보이는 방식 보다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127~128)
시편 119편에 줄기차게 나오는 것은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겠다는 시인의 다짐이며, 다른 것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이러한 다짐이 나오는 것은 시인의 상황이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끊임없이 "세상이 어디 그래?" 하며 말씀대로 살려 하는 것은 고지식한 것이라 조롱하기도 하고,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즐비하기 때문이며, 말씀을 떠나 사는 것이 더 좋아보이도록 속이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늘 믿음의 자녀들이 만사형통하리라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함께 하사 만사가 형통하였다 말하는 요셉의 경우만 보아도, 일이 잘 풀리는 노예였으며, 만사가 형통한 죄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형통과 세상이 말하는 형통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이다.
당장 눈앞의 이익이 아닌 궁극적인 소망과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님의 형통은 그래서 미련해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말씀대로 살지 말라 속이고 박해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사모하고 순종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123)
시인은 이러한 상황에서 말씀만을 의지하고 순종하겠다 다짐하고 맹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달라 기도한다.(125) 단순하게 지식으로만 알고 있어서는 말씀이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리가 커질수록, 지식이 많아질수록,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려 애쓰기 보다는 지식적으로 탐구하려 하는 나의 모습과 시인의 모습이 대조된다. 말씀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 말씀이 힘이 있다 믿는다면, 말씀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으로 깨닫게 해 달라 고백하고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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