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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예수님의 멍에 (마 11:20~30)

by 멧풀다솜 2019.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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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호수 북부에 위치한 벳새다와 고라신, 그리고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가장 많은 권능으로 복음을 증거하신 지역이다. 벳새다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소경을 고치시기도 하였으며 안드레, 베드로, 빌립이 벳세대 출신 제자들이었다.

 가버나움은 지리적으로 군사적 요충지 중 하나였기에 세관과 로마의 백부장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이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지역이고 지붕을 뚫고 내려진 중풍병자를 고치셨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고 세리였던 마태를 부르신 지역이다.

 고라신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바 없으나 회당 유적지가 발굴되었고 '모세의 자리'로 알려진 의자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유대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지역일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듯 예수님이 가장 많이 권능을 베푸신 지역이 정작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이 오히려 심판날에 견디기 쉬울 것이라 말씀하시며 소돔이 오히려 심판을 견딜 것이라 말씀하신다.


 아합왕의 부인으로 온갖 우상을 섬기고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이세벨이 두로와 시돈 출신이며 온갖 우상숭배의 근원지가 두로와 시돈이다.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당한 지역이 소돔이다. 그런데 그런 두로와 시돈, 소돔이 오히려 심판날에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다음 구절 말씀에서 이유가 설명되어진다. 예수님은 복음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에게는 숨겨졌으며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어졌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에게 복음이 숨겨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 여기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는 영적 교만이었다. 자신들은 선택되었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의 권능을 본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의 권능을 보며 이런 반응을 보였을지 모른다.


 "오~ 하나님, 역시 아브라함의 하나님, 하나님이 큰 능력을 행하셨나이다."


 합당해 보이지만 이러한 반응은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향해 "봤냐? 우리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야"하는 교만이 들어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에서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였다.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역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였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가장 바람직한 자세들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데서 출발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는 죄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회개를 통해 죄의 무게를 벗어 마음의 쉼을 얻고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는 것이다.


 백부장은 감히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직접 오시는 것을 두려워하여 말씀만 하셔도 될 것이라 요청하였다.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고백하고 인정한 것이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오래된 혈루병에서 나음을 입은 여인 역시 감히 예수님을 대면하여 간청할 처지가 아니라 생각되어 두려운 마음으로 몰래 옷에 손을 대었다가 예수님의 질문에 바로 엎드려 고백하였고,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적을 본 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이 자신에게서 떠나시기를 간청하였다.


 예수님의 멍에와 율법의 멍에. 예수님은 결코 율법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셨으며 모든 율법을 힘써 지킬 것을 강조하셨다. 그러나 율법이 주는 죄의 멍에는 회개를 통해,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계시를 받는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27)


 예수님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율법의 본질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위해 몸부림 치지만 율법을 지키지 못한데서 오는 죄책감과 죄의 무게는 덜고 오히려 그 죄로 인해 예수님께 더욱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말한다.


 무겁든, 가볍든, 멍에는 멍에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구절만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바로 이어지는 다음 구절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라는 것이다. 그로써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고라신, 가버나움, 벳새다...오늘 나의 모습이 이들의 모습은 아닐까? 영적 교만에 빠져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야 하며 겉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예수님의 멍에는 매지 않으려는 나의 모습.


 예수님의 멍에를 매야한다. 겸손과 온유를 입고,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애쓰는 삶. 그 멍에를 매는 삶을 통해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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