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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섬김의 메시아 (마 12:14~21)

by 멧풀다솜 2019.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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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과 율법으로 논쟁하던 바리새인들은 더이상 말로 어찌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들은 이제 더이상 논쟁을 하지 않고 안식일을 범한 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은 그들과 더이상 다투지 않으시고 그 자리를 떠나셨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움직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내치거나 물리지 않으셨다. 바리새인들의 살해의도를 피하시기 위해 자리를 옮기신 것이라면 사람들도 물리고 조용히 은거하셨겠으나 예수님이 자리를 옮기신 이유는 다투지 않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마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하고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을 보아라. 내가 선택한 사람,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내 영을 주었으니 그가 모든 민족에게 정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크게 소리치거나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꺽어 버리지 않을 것이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의를 베풀면서 진리를 구할 것이다.

 그는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기까지 포기하거나 약해지지 않으리니, 모든 민족과 나라들이 그 가르침을 따를 것이다.


 [이사야 42:1~4]


 사람들이 고대하고 기다렸던 메시아는 정치적인 메시아였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강력한 왕이었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모습도,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도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수님은 크게 목소리를 높여가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고, 상한 갈대도 돌보시며, 꺼져가는 심지도 살리기 위해 애쓰신다.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섬김의 모습,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내가 바라는 예수님,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이 나에게 바라는 삶의 자세는 어떤 모습일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 하신 말씀은 이러한 섬김의 자세를 따르라는 말씀이 아닐까?


 상한갈대도, 꺼져가는 심지도 쓸모 없어졌다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살피고 마음을 쓰는 모습이 아닐까?


 학교에서 잘 지내는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는 사실 선생님의 관심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 아이들은 그냥 두어도 잘한다. 하지만 상한 갈대같고, 꺼져가는 심지같은 아이들은 선생님의 관심마저 없으면 무너져버린다. 내가 보살피고 더 마음을 써야 하는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이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도 그런 것이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예수님은, 성경은 언제나 나에게 약자를, 나그네를, 이방인에게 마음을 쓰라 말하고 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잘하는 사람, 유명한 사람, ,능력있는 사람에게 마음이 더 가고 눈길이 더 간다. 잘 못하고 있는 사람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한다.


 섬김의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려 부단히 말씀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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