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불편한 점을 꼽으라면 정치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어머니는 북한에다 다 퍼주면 우리는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며 나라 망쳐먹고 있다고 하신다. 예전에는 어떻게든 어머니를 설득해 보려 했으나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아무리 이야기 해 봤자 귀를 닫고 말하는 사람하고 무슨 말을 하랴....
차례상을 차릴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아무리 명절 차례상에 밥과 국은 올리는게 아니다. 이거는 여기에 올리는거다 해 봤자. 어머니는 결국 어머니 하고 싶은신대로 한다. 그러면서도 차례상에 음식을 올려놓는 일은 나의 몫이다. ㅡ,.ㅡ 내가 제일 잘 알기는 하지만 그것 외에 어머니는 양보가 없으시다.
유튜브에서 태극기집회에 나와있는 어른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역시나 논리적으로 말하려고 하지만 논리가 없다. 기자가 몇가지 반문을 하자 무조건 "그건 아니고~"하며 귀를 닫은 논쟁만 하려한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이 그렇다.
예수님과 안식일 논쟁 이후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에 대해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다. 예수님이 병든자를 고치고, 눈먼자를 뜨게 하고, 귀신들린자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들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사용한다 생각했다.
같은 장면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혹시 이분이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했다. 예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눈먼자가 눈을 뜨고, 저는자가 걷게되고.... 그래서 그들은 저 사람이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하였다.
같은 바리새인이라도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 행동을 통해 예수님을 믿었다. 다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 할 때에 니고데모는 "우리 율법이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 판단하지도 않고 심판하는 것이냐?"(요 7:51) 하며 항의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누구보다 말씀을 잘 알고, 예언을 잘 아는 그들의 눈앞에서 예언의 성취가 이뤄지고 있음이 뻔히 보이건만...그들은 눈을 닫고 귀를 닫았다.
예수님은 "귀신의 왕이 자기 세력 깍아먹으려고 귀신들을 내쫓겠냐? 그럼 너네가 쫓아내는 귀신들은 누구의 힘이냐?"하며 굳이 항변하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바리새인들의 논리는 말이 되지 않음을 지적하셨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정죄함으로 자신이 의롭게 보여진다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안그래" 하는 사고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흠집내고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그들의 권위가 훼손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의 교만이 그들의 눈을 닫고 귀를 닫았다.
아무리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을 공부해도, 내 관심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예수님께 있지 않고, 나의 의를 세우려 하거나 내 지식을 채우려는 수단이 된다면 나 역시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정죄의 도구로, 내 교만을 채우는 교만의 도구로 말씀을 이용하게 된다.
눈이 멀지 않도록, 귀가 멀지 않도록, 말씀속에 드러나시는 하나님을 보도록, 말씀속에 나타나는 예수님을 보도록, 말씀묵상에 조심스럽게 한걸음씩 다가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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