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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정결함 (마 15:1~20)

by 멧풀다솜 2019.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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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서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논쟁하는 장면이 종종 나오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논쟁에서 한번도 예수님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부추기게 된 원인들 중 하나였다.


 바리새인들은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선대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것을 중시했다. 이러한 습성은 사회 변화에 따른 새로운 것들을 도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면서 지나칠 만큼 선대의 생활양식을 따르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특히나 식사 전에 정결한 그릇에 받은 정결한 물에 손을 씻는 행위는 전통적으로 시장이나 길에서 더러워진 몸을 정결케 하는 의식 중 하나였다. 바리새인들은 이 규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릇과 물 까지도 까다롭게 구분하여 사용했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랍비(선생)중 하나로 인기를 끌고있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식사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는 규례를 위반한 것에 대해 지적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손을 씻는 규례는 성경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선대의 가르침을 과도하게 따르려는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규정일 뿐이다. 선대가 그렇게 했으니 자신들도 그래야 한다고 믿어 그것을 하나의 법처럼 만든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부모공경을 사람에게 하는 율법 중 가장 중요한 율법으로 여겼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부모를 제대로 공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난을 퍼붓곤 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부분을 지적하셨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부모를 공양하는데 써야 할 재물중 어떤 것들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는 핑계로 부모공양에 사용하지 않았다. '고르반'이라고 하는 이 규정은 원래 하나님께 특별히 성전을 위해 서원하는데 사용하는 재물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은 부모에게 사용하기 아까운 재물에 대해 '고르반'이라고 말하면 부모님께 사용할 수 없다 말하곤 하였다.


 예수님은 율법에 명시된 부모공양을 "장로의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어기는 바리새인들을 지적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이 할말이 없도록 만들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모공경과 하나님의 율법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전통에 의해 훼손되고 있음을 지적하였으니 할말이 없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당시 바리새인들은 꽤나 존경받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대놓고 심하게 공격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심지 않으신 것은 모두 뽑아버릴 것이니 그들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라 하신다. 앞못보는 맹인이 길을 인도하는 것 처럼 저들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사람들 또한 어리석음을 지적하셨다. 


 쉬운듯 한 이 비유에 대해 제자들이 설명해달라 요구하시자 예수님은 여전히 깨달음이 없는 부분을 꾸중하신 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결국 배설물로 나오니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사람을 부정하게 할 수 없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나 행동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악한생각, 간은, 살인, 음란, 도둑질 등의 모든 악행이 나오니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 설명해 주신다.


 예수님의 비유를 제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도 일리가 있다. 예수님의 대답은 종종 동문서답 형식의 대답처럼 보일때가 있다. 바리새인을 그렇게 공격해도 괜찮겠느냐는 제자들의 말에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건 더럽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게 더럽다고 하시니 뭔가 황당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지적한 음식을 먹는 정결에 관한 그들의 전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진짜 전통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율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신 것이다. 드러나는 깨끗함으로 정결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 즉 중심의 모습으로 정결함이 드러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정결하고 거룩한 척 깨끗한 음식을 먹어봐야 마음이 악하면 드러나는 행위들이 악할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하시며 참된 거룩과 정결함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해석이나 정결에 대한 해석을 들을 때 마다 참 난감해지곤한다.

 차라리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어떤 행위나 의식을 강조하셨다면 좋겠는데 마음이란다. 중심이란다. 부적을 써도 안되는 것이고, 굿을 해도 소용없다. 힘들게 백팔번 절을 해 봐야 의미없다.


 월요 성경공부, 새벽예배, 화요성령집회, 수요예배, 목요찬양, 금요철야, 토요 학생부예배와 거리에서의 노방전도, 주일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고등학교와 청년부 시절을 그렇게 보냈었다. 그래야만 하는줄 알았고, 그래서 대학시절 선교단체 활동을 할 때에는 수요일에 모임을 잡는것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곤 하였다. 감히 예배가 있는날에 모임을 하다니....


 그런데 그런 행위들은 다 의미없는 것이었다. 마음의 중심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질 수 밖에 없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고맙고 은혜롭기 보다는 두렵고 떨린다.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 마음과 행위를 모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부끄럽고 죄인일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게 의미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의 대속이 실제로 나의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그 마음이 나와 하나님뜻대로 살아가는 손짓과 발걸음이 되도록 기도하며 노력해볼수는 있겠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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