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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예루살렘을 채우다 (느 11:1~36)

by 멧풀다솜 2019.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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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채우다

(느 11:1~36)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과 회개-부흥집회가 끝났지만, 아직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예루살렘성이 황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집에 살고 있었고, 정작 예루살렘 내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성은 의미가 없다. 이제 남은 일은 예루살렘에 누가 살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백성들은 이것을 제비뽑기로 결정하였다.


 남은 백성중에서 제비를 뽑아 십분의 일이 예루살렘 성 내에 살기로 하고, 자원하는 사람이 살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십분의 구는 자기 마을로 돌아가서 살기로 결정하였다.


 제비뽑기만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솔선하여 예루살렘에 살기로 하였다. 그렇게 해서 백성의 지도자들과, 제비뽑은 십분의 일, 그리고 자원한 사람들로 예루살렘 성이 채워졌다.


 얼핏 예루살렘에 살게 된 것이 좋아보일 수 있으나, 당시 예루살렘 성은 큰 성이기는 하였지만 살고 있던 주민의 수는 극히 적었고 황폐하였었다.(느 7:4) 간신히 예루살렘 성전(스룹바벨 성전)만 덩그러니 있고 버려진 도시나 다름 없었다. 느헤미야가 52일만에 성벽을 재건하기는 하였지만 성벽만 재건한 것이지 도시가 재건된 것은 아니었다. 


 그 황폐한 땅에 누가 살고 싶겠는가? 그것도 이미 살고 있던 집과 마을이 있는데....

 그러나 예루살렘을 비워둘 수는 없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솔선하여 자신들이 예루살렘에 살기로 정하였고, 백성들은 공평하게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다. 그리고 일부 자원하는 사람들로 예루살렘은 이제 사람이 거주하는 성읍이 된 것이다.


 이 힘든 과정을 하는데 잡음이 전혀 없다. 아무리 제비를 뽑아 결정하여도 분명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성경은 이에 대해 기록이 없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을까?


 그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를 하였기 때문이다. 말로만, 기도로만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였고, 그 회개를 맹세하고 서명하여 구체화 하였고, 그에 이어 황폐해진 예루살렘 성에 거하면서 예루살렘성을 재건을 막중한 사역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에 거하지 않게 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에 살게된 사람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다. 머물게 된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한마음이다. 특별히 약 3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살기로 결정하였는데 그중 1200명 가량이 제사장들이었다. 당연하다고 생각될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이 예배를 회복하고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참된 회개는 삶에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난다.

 울며 기도하는 것은 회개의 시작일 뿐 완성이 아니다.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울며 기도하고, 맹세로 서명하고, 삶의 터전을 예루살렘 성으로 옮김으로 구체적인 회개의 결단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삶에서 옮겨야 할 터전은 무엇인지, 내 삶은 예배를 향한, 말씀을 향한 삶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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