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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호산나, 다윗의 자손, 선지자 (마 21:1~11)

by 멧풀다솜 2019.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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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 다윗의 자손, 선지자

(마 21:1~11)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평화의 왕, 구원자 메시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하지만 화려하다.


 화려하고 멋진 군마대신 어린 당나귀의 새끼를 제자들의 겉옷을 안장삼아 얹고 그 위에 앉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 이 초라하고 겸손한 왕의 모습에 온 예루살렘은 흥분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이 나뭇가지와 겉옷을 길에 깔아 예수님을 따르며 외친다.

 "호산나! 다윗의 아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찬송하리로다! 호산나!"


 온 도시가 "호산나"와 "다윗의 자손"을 외치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는 '호산나'와, 거룩한 이스라엘의 왕 다윗을 외치며 그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이제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이 건설될 것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향해 소리친다.


 어떤 사람이 이 모습에 묻는다. "도대체 이게 무슨일이야? 저 사람이 누군데 이러는거야?" 그러자 사람들이 대답한다. "갈릴리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선지자야"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갈릴리 사람, 나사렛 사람 예수였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메시아가 아니라 '선지자', 아니 어쩌면 '사사'를 기다리고 기대하였다. 입으로는 '호산나'를 외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구원은 정치적인 구원이며 이스라엘의 독립이었다.


 '다윗의 자손'을 외치고 있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왕' 이었다.

 로마 황제에게서 벗어난 자신들만의 왕의 기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지만, 어쩌면 나도 이 사람들처럼 내가 기대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 하나님의 모습을 믿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예수님의 주 되심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하나님, 내가 원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놓고 거기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끼워맞추고 있는지 모르겠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말씀하셨고, 구원을 말씀하셨지만, 십자가는 그저 내가 희생해야 할 어떤 노력 쯤으로 인식하고, 구원은 그저 암담한 현실을 벗어나게 해줄 극적인 판타지를 상상하며, 위대한 선지자, 사사를 기다리고 있는것은 아닐런지....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읽으며 흥분하고 답답해 하던 때가 있었다.

 광야시대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배반과 하나님의 긍휼을 보면서 "아니 도대체 왜? 구름기둥 안보여? 불기둥 안보여? 아침에 만나 거두지 않았어?"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이스라엘의 타락을 보면서는 "미친거 아냐? 하나님이 그렇게 까지 용서하시고 구원하셨는데, 그걸 또 까먹어? 그러고 힘들어지면 또 그때 가서야 외쳐?"

 포로기와 귀환시대를 보면서도 "와~ 이사람들 진짜 답없네,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와 성전을 건축했으면 이제 깨달을때도 되지 않았나?"

 예수님의 공생애와 제자들을 보며 "아이고~ 예수님 얼마나 답답하실까? 이렇게 말귀를 못알아듣는 제자들이라니...."


 그런데 그게 나였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보고 싶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그려놓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외치며 위대한 선지자, 사사를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말씀묵상을 매일한다고 하여, 좋은 설교를 매일 듣는다 하여, 신앙서적을 많이 읽는다 하여, 그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조금의 도움은 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듣고 싶은 것만 들린다 하였던가?

 내가 이미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이미지로 그려놓고 보고 듣는다면 하나님을 알아갈 수 없다. 말씀속에 드러나시는 하나님을, 말씀속에 드러나시는 예수님을 겸손한 모습으로 바라보며 더욱 알아가려는 모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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