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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세상의 빛과 소금 (마5:13~20)

by 멧풀다솜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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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의 사명을 선포하신 예수님.

앞의 11~12절과 마찬가지로 특히 제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해 하신 말씀이다. 빛과 소금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수행하여야 할 과제를 우회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세상의 소금 (13절)

소금은 단지 짠맛을 낼 뿐 아니라, 음식물이 가지고 있는 맛을 끌어올리는 천연 MSG 중 하나이다. 또한 소금은 음식의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소금이 맛을 잃게 되면 그야말로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물질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소금이 음식의 맛을 끌어올리듯, 다른 사람을 섬겨 그 사람의 맛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음식에 소금이 없어도 맛이 밋밋하여 좋지 않지만, 소금이 과하게 자기주장을 해도 음식의 맛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소금은 음식에 녹아들어 완전히 그 음식의 맛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정도의 짠맛을 유지할 때 음식의 맛이 좋아진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녹아들어야 한다. 하지만 완전히 녹아들어가되 짠맛을 잃어서도, 과하게 자기주장을 해서도 안된다. 소금의 역할은 딱 그 정도이다. 그래야 음식의 맛을 살리기도 하고, 음식이 부패하는 것을 막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종종 보이는 '우리 끼리' 라는 신앙의 모습은 얼마나 위험한가? 소금으로만 맛을 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또 과하게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사람 역시도 적절한 소금의 역할은 아닐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나는 자꾸 나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하기보다는 나를 믿고 따라오라는 식으로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작년에 참 힘들었다. 뒤늦게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하고, 그 특성에 맞게 수업형태를 바꾸고 그 속에 내 가치나 교육관을 녹여내려 할 때 그나마 효과가 있었다. 가르치는 사람은 특히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소금의 역할을 기억해야 하겠다.

너무 자기 주장과 가치만을 내세우고, 그것을 따라오지 않는다고 답답해하고 화내기보다는, 천천히 나를 녹여가며 그 속에 적절한 염도를 유지하며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일. 그것이 올해의 내 과제가 되었다.

 

세상의 빛 (14절)

소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빛'에 대한 표현을 살펴보면 우선은 '산 위의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라 말씀하고 계시다.

이스라엘의 전통 가옥 형태

목축업을 주로 하던 이스라엘은 상자 형태의 집을 작은 산이나 언덕을 따라 배치하여 마을을 형성한다. 그래야 마을 주변의 목초지나 농경지를 활용하기 좋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을 지나는 순례자들은 그래서 어두운 밤에도 불빛이 보이는 마을을 찾기가 쉬워 여행자들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한다는 말씀은 다른 말로 반드시 드러내어 여행자들의 길잡이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릴 적에 명절을 맞아 고향을 가서 사촌들과 밤 늦게까지 놀다가 큰댁으로 돌아가는 길은 논길이었다. 집들이 드문 드문 멀찍이 떨어져 있고 가로등도 없던 때라 정말 달빛에 의지해 길을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길을 걷다 보면 거리감각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감각이 무뎌지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밤길을 걷다가 보이는 집의 불빛은 참으로 반갑기도 하고 다 왔다는 안도감을 주기도 했으며, 내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뿌듯함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빛이 나야 한다. 그런데 그 빛은 자신을 드러내는 빛이 아니다. 그 빛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길을 안내하기도 하고, 집 안의 모든 사람이 밝히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빛의 역할이다. 빛은 주변을 밝히 보여주지만, 빛을 보라고 하지 않는다. 빛을 보면 오히려 불편해진다. 빛은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비추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보여주기 위해 비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빛과 소금의 역할에 대해 분명하게 다신 설명해 주신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다.(16절)

예수님은 사두개인,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들을 맹렬히 비난하셨지만 율법을 무시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율법으로 갈아탈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율법을 완전하게 하며,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모두 이루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보여야 한다니...

이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식적인 의를 이야기하신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지키려는 태도 자체는 비난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롬3:19)이다.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 완전할 수 없으며 가능하지도 않다. 그럼 어쩌라는 말인가?

 

여기서 문득 다른 의문이 든다.

그래, 내가 소금이고 빛이라 치자. 그런데 소금이 맛을 조절할 수 있는가? 소금을 사용하는 사람이 조절한다. 등잔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가? 누군가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주어야 빛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것이 가능하려면 내 안에 빛 되신 예수님이 계셔야 하며, 그 예수님과 성령님이 활동하시도록 나는 겸허히 나를 비우는 수밖에 없다. 녹아들고 타들어가면서...

 

세 가지 밭의 비유로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도 역시 동일하다. 어떻게 밭이 스스로 좋은 밭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농부가 좋은 밭에 뿌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럼 밭은 그 씨앗을 품고 양분을 공급하여 자라게 하면 그뿐이다.

 

내가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내가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하려면, 나는 짠맛을 유지하고 있으면 되고, 언제든 녹아들고 타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내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나를 사용하시고, 내 안의 짠맛을, 내 안의 빛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녹아들고, 타들어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내 삶을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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