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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함께 하지 않으면 반대하는 자요 (마12:10~30)

by 멧풀다솜 2023.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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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에 관한 논쟁이 일단락 되고 예수님은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때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예수님께서 자기를 고쳐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찾아왔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과 예수님을 눈여겨보았다. 그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이 이 사람을 고친다면 이번에야말로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 고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 놓고 예수님께 질문을 한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은 옳은 일입니까?

 이 질문은 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다. 옳다고 한다면 안식일을 가벼이 여긴다고 몰면 되고, 옳지 않다고 한다면 안식일이니 예수님께 나온 많은 병자들을 고치지 말라고 하려 하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이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양이 한 마리만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안식일에 그 양이 구덩이 빠져버렸다. 이 양을 구해야 하겠느냐? 아니면 그냥 죽게 버려두어야 하겠느냐? 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훨씬 귀한 존재인데 어찌 당연한 것을 묻느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바리새인들은 분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들이 의도한 대로 되기는 커녕 예수님의 논리대로라면 자기들의 가르침은 안식일에는 옳은 일도 하지 말라고 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죽일 계획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더이상의 무의미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회당에서 떠나시자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예수님은 그들을 다 고치시며 예수님이 고치셨다는 것을 말하고 다니지 말라 말씀하신다. 이런 함구령은 예수님의 행적에서 종종 나타나는데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목적이 이적을 행하고 사람들을 고치시는 것이 아니었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아픔을 그저 지나칠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마태는 이것을 예언의 성취로 보았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사42:1~4)

 어떤 사람들이 귀신 들림으로 인해 눈멀고 말 못 하는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려왔다. 예수님은 역시나 이 사람도 고치셨다. 이에 사람들이 놀라 "이 분이 참으로 메시아(다윗의 후손인가)인가?" 하며 웅성거렸다. 간혹 귀신 들린 사람을 바리새인이나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쫓아내기도 하였고 병든 자를 고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귀신 들리고 말 못 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을 한 번에 치료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바리새인들도 당황하였으나 무리들에 섞여 말을 보탠다.

이런 능력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야.
귀신들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어?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놀람에 말을 보태면서 은혜보다는 두려움을 이용한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귀신들의 왕' 이 훨씬 두렵고 자극적이다. 군중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예수님의 메시아적 지위를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몇이 '그런가?' 하기 시작한다. 율법에 대해 정통하고 예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여겨지는 바리새인들의 판단은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 의도를 아셨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분쟁을 하는 나라는 올바로 서지 못할 것이고, 다툼이 있는 동네도 그러하며, 집은 더욱 그러하다. 귀신이 귀신을 쫓아내면 귀신들이 서로 싸우는 것인데 그럼 그 사탄의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있겠느냐?
 그래, 내가 만일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너희 제자들은 무슨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냐?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인지, 바알세불의 능력인지에 대한 판단은 너희 제자들이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묶어두고 나서야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집을 강탈하는 것이다.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흩트리는 사람이다.

 바리새인의 제자들 중에도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이 있었고, 예수님도 이를 인정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판단의 옳고 그름은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하게 될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귀신의 힘이라면 바리새인의 제자들 역시 귀신의 힘을 빌린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메시아임이 입증된다. 그러니 이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선택하라 요구하신다. (30절)

 예수님과 함께 하든지, 아니면 계속 반대하든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에 설 것이라면 사람을 모으는 일을 하든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행위가 단지 예수님과 함께 같은 공간에 있는 것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에 그렇게 하지 말도록 막았다고 예수님께 고할 때 예수님은 막지 말 것을 명하셨다. (막9:38~41)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상처 입은 자, 아픈 자, 도움이 필요한 자를 기꺼이 돕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이라는 표현으로 사람을 '모으는'(synago. 헬. 모으다. 초대하다. 영접하다. 움직이다) 일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어찌 동행할까? 그러나 사람들은 때로 보이지 않는 존재와 동행하는 것이 쉽고, 보이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이 어렵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증명할 길이 없고 결국 반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다. 그 말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 명백하게 보인다.

 

 바리새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척' 하며 거룩한 '척'을 하였다.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룩한 척은 하지 않으신다. 드러내지 않고 소문내지 않으신다.(16절) 그저 자신을 찾아오는 연약한 자들을 돌보시고,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살피신다.

 

 내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마땅히 예수님과 함께 하여야 하며, 그것은 연약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드러내지 않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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