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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마11:20~30)

by 멧풀다솜 2023.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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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 요한의 질문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대답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가버나움 지역을 비롯한 동네들은 오히려 회개의 열매가 다른 고을들에 비해 현저히 적게 나타났다. 이에 예수님은 이러한 지역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 예고하신다.

 

 두로와 시돈,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는 전형적으로 이방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기도 하며 죄가 많아 심판을 피하지 못하는 도시의 대명사가 되어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바다가 그 파도를 굽이치게 함 같이 여러 민족들이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무너뜨리며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나도 티끌을 그 위에서 쓸어 버려 맨 바위가 되게 하며, 바다 가운데에 그물 치는 곳이 되게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가 이방의 노략거리가 될 것이요, 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을 알리라. (겔26:3~6)

 이런 두로와 시돈 일지라도 만일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을 보았다면 회개의 자리로 나왔을 것이다. 실제로 두로와 시돈 지방을 다니실 때 마주친 이방 여인은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지 않는다"는 모욕적인 예수님의 말에도 예수님의 말이 옳지마는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하여 구원을 얻었다. (마15:21~28)

 

 특별히 가버나움에 대하여는 더욱 가혹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사14:13~15)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이자 본거지처럼 활용된 지역이 가버나움이다. 그런 가버나움이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가버나움 사람들의 교만이 마치 이사야서에 나타난 하나님보다 높아지려 하다 추락한 하늘의 존재 '계명성'에 견주어 가혹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복음을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회개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이 하나의 장식품처럼 작용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말씀의 적용을 나에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한다면 역시나 말씀을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나를 치장하고 높이는 데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마을들에 대한 준엄한 경고에 이어 25절부터는 하나님께 드리는 환희의 감사 기도로 종결을 맺고 있다(25~26절).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예수님의 비교 불가능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전권을 드러내신다. (27절) 그리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으니 예수님을 따르라는 강력한 권고가 이어진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 어린아이들, 죄인들, 여자.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구성은 이렇게 보잘것없고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사29:14)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5b)

 하지만 이렇게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지혜롭고 슬기롭다 여기는 바리새인, 서기관,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향해 심판을 쏟아내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는다. 예수님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의 찬송이 되고 있다.

 

 예수님의 멍에, 예수님의 짐이 쉽고 가볍다는 말씀. 그것은 바리새적인 율법의 엄격한 준수와 비교할 때 진정 쉽고 가벼운 짐이기는 하다.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위해 그 많은 율법들을 꾸준히 읽고 암송하며 하나라도 어기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바리새인들의 삶의 방식은 당시 많은 유대인들에게 버거운 일이었고,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의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삶의 양식은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며,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삶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치 내가 지금 힘들고, 괴롭고,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으나 예수님께로 가면 평안한 삶이 보장되는 것처럼 너무 쉽게 받아들이곤 한다. 예수님은 결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쉽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쉬게 하리라'는 말씀의 맥락을 살펴보면, 율법주의적인 바리새인들의 삶의 양식에 비해 현저하게 쉽고 실천 가능한 것이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는 말씀이다. 그 마저도 메지 않고, 예수님의 짐 조차도 지려 않고, 그저 '쉼' 만을 얻으려 하고, 그저 평안만을 얻으려 한다면 차라리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 이나 종교에서 찾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를 일이다.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예수님의 멍에, 예수님의 짐. 나는 이것을 짊어질 자세가 되어 있는가? 어떠면 나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율법주의에 빠져, 지식에 빠져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거나 얕잡아 보는 것으로 내 의가 드러나리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짐을 지는, 그러한 삶의 자세를 견지하도록 기도하며 내 삶을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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