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QT)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마11:11~19)

by 멧풀다솜 2023. 2. 15.
728x90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내가 장담컨대 여자가 낳은 사람 중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 조차도 그보다 크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고, 요한은 자신의 사명에 따라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였고,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요한에 대해 언급한 말라기서의 예언(말3:1)에서 '사자'는 말라기 4장 5절에서 '엘리야'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엘리야'는 역사 속 위대한 선지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앞으로 올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 중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로 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분명하게 요한이 엘리야 임을 밝히신다.

요한의 때 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했다. 그리고 침노하는 자는 빼앗았다. 모든 선지자들과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의 예언이다. 만일 너희들이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을 받아들인다면,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요한이다.

 12절의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 이란 표현은 다소 생소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침노'로 번역된 헬라어는 '비아조마이(biazomai)' 인데 이 말의 뜻은 '강권하다', '힘을 사용하다', '폭력을 사용하다', '강요하다', '힘차게 온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 구절이 사용된 또 다른 본문은 누가복음 16장 16절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 까지이며. 그 이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16:16)

 마태복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서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는 구절의 '침입'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것을 문맥적으로 살펴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분명 요한에 대한 평가에서 나온 것이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며 마지막 순교자이고, 신약의 첫 순교자로 이전 세대와 새로운 예수님의 시대를 잇는 중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한의 선포로 인해 천국(복음, 예수님)이 도래하였으며 그 천국은 강력한 폭력적인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는 해석으로 보는 것이 조금 더 자연스럽다.

 

 본문의 앞 장인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에게 닥칠 고난과 시련, 핍박에 대해 말씀하셨다. 천국을 강하게 반대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대해 예수님은 '천국을 침노한다'라고 표현하신 것이며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반대와 핍박이 실제로 일시적 성과를 거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뒤에 이어지는 본문을 살펴보면 조금 더 명확해진다.

귀가 있다면 좀 알아들어라.
내가 지금의 이 답답한 세대를 무엇이 비유할까? 비유하자면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친구들을 불러 함께 놀자고 하는데 혼인잔치 놀이를 하자 하여도(피리를 불어도) 싫다 하고, 장례식 놀이를 하여도(우리가 슬피 울어도) 싫다고 하는 것 같다.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 귀신 들렸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니 한다는 소리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 하는구나. (15~19절 의역)

 복음이 전파되지만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 어떻게 해도 받아들이진 않으면서도 마치 힘으로 천국을 빼앗을 수 있다 여기는 것처럼 자신들의 권위와 의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내세우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결국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제자들을 핍박하면서 복음(천국)이 전파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 결과적으로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조금도 손해를 보려 않고, 오히려 축복만을 바라거나 사람들의 인정만을 바란다면 나는 천국을 침노하는 침략자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에 기꺼이 동참하는 삶. 그 한없이 자애롭고 순결한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는 삶. 그것이 천국을 지키는 자의 삶이며 복음을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일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의도하지 않게, 때론 의도적으로 날카로운 말을 내뱉으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어디 아이들한테만 그런가? 동료 교사들에게, 때론 가족들에게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겠다. 때론 부당한 대우를 받고, 때론 오해를 받을지라도, 내가 받는 부당함과 억울함이 어디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에 비할까.

 

 예수님은 복음에 합당한 삶이 많은 명예와 영화를 누리는 삶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이 사실을 명심하고(솔직히 받아들이고 싶진 않지만)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아닌, 천국을 지키는 자의 삶을 살아야겠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