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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너희도 온전하라 (마5:33~48)

by 멧풀다솜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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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하지 말라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19:12)

 유대교에서는 맹세를 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때에 맹세를 지키지 못할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 여겨 이를 문제 삼았다. 그래서 종종 유대인들은 우회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 식으로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회적으로 맹세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물 그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 가르치신다. 맹세를 하지 말고 그저 옳은 것은 옳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말씀하시며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악으로부터 나온다 말씀하신다. (34~37절)

 

 예수님이 오심으로 임박한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에게 진실과 성실, 그리고 하나님의 지극이 높고 거룩하심에 대한 자각을 요구한다. 이러한 덕목은 갖가지 맹세를 통한 보증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사도 야고보 역시 야고보서에서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약5:12)

 

원수를 사랑하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21:24~25)

 예수님이 인용하신 출애굽기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규정의 의도는 무제약적인 보복에 대해 분명한 선을 긋는 이른바 '동배보복의 원리'이다. 하나님이 이 같은 규정을 두신 이유는 사적인 보복을 공적인 영역으로 가져 옴으로서 개인의 자의를 억제한 것이며 엄격한 하나님의 율법으로 만인의 평등함과 부당한 처벌을 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율법사들이나 서기관들은 이를 '보복의 정당성'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율법을 만든 하나님의 의도에 주목하여 가르치신다.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함에 있어 내가 정당한 대우를 받는가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의 태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오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보다 중요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곧 오고 계신다는 엄청난 사건은 우리의 모든 분쟁을 잊게 할 수 있으며, 원수에 대한 사랑까지도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

 

 유대인 사회에서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상대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심각한 모욕의 행위이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한 대 맞았어도 참고 더 맞으라는 의미 이상을 나타낸다. 오른 뺨을 때리기 위해서는 오른손 손등으로 때릴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누군가 나를 심각하게 모욕할지라도 기꺼이 그것을 감내하라는 것이다.

 

유대인의 속옷은 '안에 입는 옷'의 개념이다.

 누군가가 나를 고발하여 재판을 하여 담보물로 속옷을 가져가려 한다면 겉옷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 역시 누군가 내 것을 탐내거든 그 이상을 주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일교차가 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혹독한 밤의 추위를 막는데 이불 대용으로 사용하는 겉옷은 속에 입는 속옷보다 매우 중요하다. 속옷을 가져가려 하면 겉옷까지 내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 대로라면 이렇게 중요한 겉옷을 주는 것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나를 송사한 적대자 앞에서 알몸으로 서게 되는 셈이 된다.

 

 억지로 나에게 오 리(약 2km)를 억지로 가게 한다는 것은 길을 안내하거나 짐을 나르는 일에 당시 로마 군인들은 현지의 유대인들을 아무 때나 강제로 동원할 수 있었다.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같이 가 주는 의미가 아닌, 길 안내나 짐을 들어주는 '봉사' 내지는 '부역'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 리를 억지로 가게 한다는 것은 그닥 즐겁지 않은 일에 내가 동원되는 것인데 십 리를 함께 가라는 말씀은 억지로 동원된 일 그 이상을 해 주라는 말씀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규정은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 유대교 내부의 당파 싸움에서 이러한 계명이 나타난다. 자신들만이 참 이스라엘이며 더럽혀진 성전을 중간 시기 동안 대신할 자들이라고 여긴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 이외에 나머지 유대인들은 모두 타락한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으로 규정하고 이를 '어둠의 아들들'이라 불렀다. 또 외경인 '집회서'에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 겸손한 사람, 착한 사람만을 도와주고 원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도움을 주거나 선대 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참고 : 집회서 12장 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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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만 도와주고 죄인은 도와주지 말라. 겸손한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고 교만한 자는 돕지 말라. 그런 자에게는 빵도 주지 말고 남이 주는 것도 막아라. 그가 너보다 힘이 강해질까 두려움이라. 그리고 네가 그에게 선을 베푼 대가로 그는 너에게 두 배의 악으로 갚을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부터 죄인들을 미워하시고 악인들에게 응분의 벌을 내리시니 너는 착한 사람만을 도와주고 죄인은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은 아마도 이러한 모세의 율법서 '토라'가 아닌 유대인들의 율법서를 인용하여 말씀하신 듯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가르침을 뛰어넘는 사랑을 요구하신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요구야 말로 하나님의 본질과 행동(45절 b)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권 취임의 임박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과 그의 나라를 체험한 사람은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의 극단적 형식은 구약에는 아직 없으며 예수님이 새롭게 제안하신 율법은 아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출23:4~5)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잠24:17)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잠25:21)

 따라서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자신들만이 완전한 이스라엘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고 여기는 쿰란 공동체뿐 아니라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얼마나 율법을 모르고 스스로 만든 법 안에 갇혀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계시는 것이다.

 

너희도 온전하라

'온전'하라는 히브리어 '타밈'은 온 마음을 다 바치는 것, 혹은 어떤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온전함'이란 흠잡힐 데 없이 완벽함을 뜻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전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19:2b)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신18:13)

 성경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그의 백성도 거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를 인용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제자들에게 하나님처럼 '완전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행위는 그 거룩한 본성과 만인을 위한 무한하신 사랑에 온전히 상응하며 또한 이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과 같은 방식과 정도로 하나님의 자녀의 태도와 행동도 어떠한 경계도 없는 완전한 사랑을 반영해야 한다.

 

 오늘도 망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참으로 버겁고, 힘들고,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도대체 어느 정도라야 말이지. 이젠 하다 하다 '완전'하라니... 이게 가당키나 한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나를 좌절하게 만들고 계신다.

 뭐... 별 수 있나. 하는 데 까지 해 보려고 애쓰는 수밖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니 그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하도록 나를 바꾸시든지, 힘을 주시든지 하라고 떼쓰며 기도하는 수 밖에. 그런데 사실, 그렇게 기도하는 것도 힘들다. 아니, 싫다. 그렇게까지 원수를 사랑하고 싶지 않고, 나를 박대하는 사람에게 선대하고 싶지 않다. 그게 진짜 내 솔직한 마음이다.

 그런데 말씀 앞에 서니 그런 내 마음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려서 불편하다. 어쩌란 말인가? 그 불편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으니 겸손히 무릎 꿇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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