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QT)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마6:19~34)

by 멧풀다솜 2023. 1. 31.
728x9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예수님은 재물 관리에 대한 가르침을 말씀하신다. '보물'로 번역된 헬라어는 '테사우리소'는 '곳간', '창고', '보물상자'를 의미하고 '쌓아두다'로 번역된 헬라어 '테사우리조'는 보물을 긁어모으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단지 부를 축적하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 아니라 탐심으로 재물을 긁어모으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나 단서 조항이 되는 '너희를 위하여'라는 구절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재물을 모으는 것을 경계하고 계신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계시는 것은 율법을 의미를 제대로 알고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는 것인데 그 하나님의 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재물을 자기 자신을 위해 모아서 쌓아두는 행위는 결국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행위가 된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돈 보다는 값비싼 옷이나 담요, 혹은 옷감, 금속 등으로 부의 정도를 나타내었다. 때문에 좋은 옷감을 아무리 쌓아 보관해 봤자 오래 두면 결국 좀이 슬 것이고, 귀한 금속을 모아두어도 녹이 난다는 것이다. 수시로 꺼내서 사용하거나 자주 손을 대는 것들은 쉽게 녹슬거나 좀이 슬지 않는다. 하지만 오랫동안 쌓아두고 방치해 둔 금속은 녹이 슬기 마련이고 옷감은 좀이 피어나기 마련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가르치신 예수님은 이처럼 필요 이상의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그 재물이 아무런 가치를 드러내지 못할 뿐 아니라 모아두는 그 행위 역시 의미가 없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오히려 재물의 축적으로 인해 사람의 마음을 그곳에 두게 만들어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든다.(21절)

 

 '나쁜 눈'은 질투, 시기, 탐욕을 가리키는 회화적 표현이며 '성한 눈'은 그런 것들에서 자유로움을 가리킨다. 동시에 눈은 사람에게 '등불'에 해당한다. 그 불빛으로 사람은 자기의 환경을 밝히며 그것을 수용한다. 그런데 이 '등불'이 어두운 빛을 발할 때에는 그 사람 전체는 온통 어둠에 묻혀 있는 상태가 된다.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면 재물을 모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24절의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재물이 아니면 하나님 둘 중에 양자택일을 분명히 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재물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재물을 모으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섬김'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듈루오'로 노예가 되는 것. 종교적 헌신으로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재물을 모으는 행위 자체를 경계하셨다기보다는 도를 넘어 종교적 수준으로 재물을 탐하고 결국에는 그 재물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까에 마음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생계'를 위한 근심,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뭐먹지? 뭐 입지? 이런 걱정들이 부질없음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이다.

 공중의 새들은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창고에 곡식을 쟁여두지도 않지만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임을 강조하신다. 하물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다. 날짐승조차 먹이시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아보지 않으실 리 없다는 믿음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오심, 즉 하나님의 다스림이 완전히 나타나는 것에 맞추어 살며 현재의 삶을 이 미래의 빛에 전적으로 비추어 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데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표는 재물을 모으거나 이 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삶 가운데서 실현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 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 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앞의 구절들에서 설명하셨다.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사모하며, 온유함과 청결한 마음으로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는 삶.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삶. 이를 위해 기꺼이 박해도 감내하는 삶(마태복음 5:1~6:18)이 바로 그것이다.

 

 많은 재물을 쌓아놓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 땅에서 그리 큰 부자가 되고 싶지도 않다. 다만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으면 좋겠는데....사실, 매번 부족하고 매번 힘들다 여겨졌지만 어찌어찌 매달 꾸역꾸역 채워지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은혜임을 실감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좀 불편하다.

 그냥 편안하게 살 수는 없을까? 매달 가슴 졸이며 이번달은 또 어떻게 넘길까 고민하지 않으며 살 수는 없는걸까? 사실 매달 그렇게 버텨왔지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도 알지만, 그러한 고민이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무의미한 고민이라는 것도 알지만....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삶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오죽하면 '십자가'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삶의 가벼운(?) 십자가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찌 만만하고 가벼울까? 재물에 대한 근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서 드러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