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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마8:14~22)

by 멧풀다솜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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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신다. 예수님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데 귀신 들린 사람들, 병든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을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신다.

 마태는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이적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사야서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53:4)

 

 이사야 53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예수님의 모습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는 내내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예언의 성취"에 주목하며 예수님이 참 메시아요 그리스도임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인들, 병든 자들, 귀신 들린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기에게로 나아오는 그 모든 사람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이적에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여들게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갈 것을 명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을 에워싼 무리 중 어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며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중 율법학자인 서기관이 예수님에게 제자가 될 것이라 말한다.

"선생님, 선생님이 어딜 가시든 전 따를 것입니다.(19절)"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 그래도 따르겠느냐?(20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고향도 없고, 보호막도 없는 처지에 동참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서기관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신분이면서 안정된 삶을 누리는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신분과 안정된 삶을 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가 물으시는 것이다. 

 

 정 반대의 경우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무리가 아닌 제자들 중 하나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잠시 떠나게 해 줄 것을 예수님께 요청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요청을 거절하신다. 예수님의 대답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하지만 너는 나를 따르라" 이다.

 

 유대사회에서 장례는 최고의 선행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이 죽으면 '헤브라카디샤(거룩한 형제들)' 이라는 장례위원회를 조직하게 된다. 장례를 돕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으며 이 '거룩한 형제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장례식은 고인의 가족뿐 아니라 그가 속한 온 말을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지만 마을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게 되면서 특별히 선정된 이 거룩한 친구들이 맡아서 진행하며 모든 장례비용은 이들에 의해 충당된다.

 

 유대인들은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고인의 곁을 떠나는 것을 엄청난 결례이며 모독이라 여긴다. 그래서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면 그 방을 떠나지 않고 임종을 지켜보는 것으로 고인에 대한 최고의 경의를 표하며 임종 후 무덤에 안치될 때까지 시신을 홀로 방치하지 않고 이 기간 동안 계속하여 시편을 낭송한다. 또한 장례식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은 고인에 대하여 어떤 부정적인 말이나 비판을 할 수 없고 오직 고인에 대한 좋은 추억이나 그가 남긴 선행, 교훈 등 만이 대화의 주제가 될 수 있었다. 유대인의 이러한 장례 문화를 '타하라'의식이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가 장례식에,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부친의 장례식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는 자식의 마땅한 의무이자 십계명에서 요구하고 있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는 율법에도 저촉이 되는 일이다. 다만 아버지의 장례가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제사장과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나실인'들이었다.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 (레21:11)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 것이요, 그의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말미암아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의 머리에 있음이라 (민6:6~7)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아니다. 오히려 험난하고 고된 삶이다. 여기저기 떠도는 신세이며 누울 자리조차 없는 삶이다. 또한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친 삶이다. 제사장과 같은 삶이며 나실인과 같은 삶이다. 이러한 결단과 각오 없이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땐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친구의 꾀임(?)에 넘어가서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 '난 예수님을 믿을래요' 하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웬걸?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엄청난 부담감만을 가중시킨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내 삶의 우선순위가 되며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나실인의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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