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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9:1~13)

by 멧풀다솜 2023.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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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사하시다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구해주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서 집에 계실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집에 모여들어 가르침을 청했고,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셨다. (막2:1~2)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도 있었다. (눅5:17)

 

 어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원하고 데려왔으나 많은 사람들 때문에 들어갈 수 없어 궁리 끝에 지붕을 뜯고 침상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아 내렸다. (막2:3~4, 눅5:18~19) 예수님은 중풍병자보다는 이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 예수님이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은 지붕을 뜯어서라도 예수님에게 다가갔고, 그 믿음이 중풍병자를 낫게 하였다.

 

 예수님은 "아이야, 안심하렴. 너의 죄가 용서받았다" 말씀하셨다. 이 말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충격을 받았다. '죄를 사하다니? 감히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권능을 어찌 함부로 입에 담는가?' 예수님은 이들의 이 생각을 아시고 이들의 생각을 지적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악한 생각만 하는구나. '너의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라' 하는 말 중 어느 것이 더 쉽겠냐? 하지만 인자는 세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능이 있는 줄 너희들이 알게 할 것이다. 일어나거라. 그리고 네 침상을 들고 집에 가라 (막9:5)

 사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둘 다 어렵다.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죄 사함의 권능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십계명 중 세 번째 율법을 위반하는 중죄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도 쉽진 않다. 말이야 할 수 있겠지만 말한다고 해서 병이 나으리란 보장이 없고, 오히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두 가지 말을 다 사용하셨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둘 다 어려워 보이지만 더 어려운 쪽은 율법학자나 서기관,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죄 사함'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 사함'을 선언하신 뒤 그 증거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인자(사람의 아들)'라고 표현하셨다. '인자'라는 표현은 에스겔서에서 '선지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14)

 신약시대에 와서 '인자'는 다니엘서의 예언을 바탕으로 최후 심판 후 하늘로부터 와서 권능으로 세상을 다스릴 인물이며 메시아로 인식되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인자'라고 부르심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메시아임을 알리고 계신 것이다.

 

 중풍병자가 나은 것을 본 사람들은 놀라서 두려워하며 '이러한 권능을 사람에게 주시다니!'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인자가 세상에서 죄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 알게 하리라' 말씀하셨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자'가 아닌 그저 사람에 불과한 존재로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성경 속 인물이나 종교적인 존재? 나에게 예수님이 '인자'로 계시는가?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있는가? 관성적으로,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지붕을 뚫고서라도'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절박함도 없이 믿고 있지는 않은지...

 

마태를 부르시다

 세리는 로마 지배하에 있던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유대인들이 세리를 멸시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금을 걷는 직업 특성상 로마 정부를 위해 상품이나 농산물을 도시로 들여오거나 반출할 때에 세금을 부과하여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이방인들, 부정한 동물들과 접촉을 하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들 취급을 받았다.

 

 또한 로마의 세금 제도는 부정을 유도하는 제도였다. 로마에 바쳐야 하는 세금은 정해져 있으나, 세금을 걷는 사람은 별도의 수당이 없이 재량껏 걷은 뒤 정해진 세율은 로마정부에 바치고 남는 금액을 자신의 수익으로 삼도록 하기 때문이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이런 세리들은 '강도', '도둑' 취급을 당했고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 매국노 취급을 당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일제강점기 일본 순사 밑에서 정보원 역할을 하는 조선사람인 셈이다.

 

 마태는 세리였다. 그런 세리를 예수님은 제자로 부르셨고,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였다. 예수님은 마태와 함께 마태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신다. 마태의 동료 세리들, 제자들, 예수님을 보려고 온 사람들로 집안이 가득했다. 바리새인들은 못마땅했다. 저 부정한 강도, 매국노와 같은 세리와 함께 앉아서 밥을 먹다니. 하나님의 선지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한마디 하였다.

당신 선생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는구료

 이 말은 왜 그런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따르고 있는 예수라는 사람이 따를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들의 말을 들으시고는 바리새인들에게 답하신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는 필요가 없다. 아프고 병든 사람이 의사가 필요한 것이다. 가라!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 배워라. 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난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다.

 예수님은 호세아서를 인용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고작 알량한 율법의 의나 예배가 아니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자비와 인애를 베풀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더 원하심을 말씀하셨다. 죄인들을 멸시하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라 여기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6:6)

 이에 예수님은 때문에 의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죄인들을 구원하고 보살피기 위해 오셨음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위로와 도전이 동시에 된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니 일단은 안심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긍휼, 자비이다. 사실 요즘 이래 저래 거슬리는(?) 사람이 몇 있다. 뭐라고 딱 짚어서 말하긴 어려운데 암튼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인애'와 '자비', '긍휼'을 말씀하시다니 참... 사실 나쁜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저 내 취향에 맞지 않고 나와 맞지 않는 부분들 때문에 말 그대로 '거슬릴' 뿐이었다. 마음을 고쳐 먹어야겠다. 예수님도 나를 용납하시고 하나님도 나를 용납하시는데 내까짓게 뭐라고...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내가 먼저 웃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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