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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마9:27~38)

by 멧풀다솜 202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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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나서는데 맹인 두 사람이 따라오며 큰소리로 예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개의치 않으시고 집으로 들어가신다. 두 맹인은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온다. 이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내가 이 일을 할 것이라고 믿느냐?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앞을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고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앞을 보게 된 것을 온 사방에 소문을 내었다.

 

 이번에는 어떤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려왔다. 예수님은 이번에도 그 사람을 고쳐주셨고, 귀신이 떠나가자 말 못 하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놀라며 말하였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종종 선지자들은 놀라운 이적을 펼치곤 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적은 조금 달랐다. 눈먼 자가 눈을 뜨고, 말 못 하던 자가 말을 하게 된다. 귀신이 말 한마디에 쫓겨난다.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물으러 올 때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빌어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 말씀하셨다.

주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사26:19a)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29:18)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 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사35:5-6a)

 이사야서의 이 예언은 유대인들에게 대대로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인식이 되어 있었으며 로마의 지배를 받던 예수님 시대에는 메시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과 믿음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그런데 예언의 성취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맹인이 눈을 뜨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말 못 하는 자가 말하게 된다.

 

 누구보다 성경과 율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의를 추구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입만 열면 강조하는 "새 계명" 은 용납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율법을 지킨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고 하질 않나 의인이 필요 없고 하나님은 죄인을 부른다고 하는 예수님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이적을 베풀 때마다 "저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야. 저 사람은 귀신들의 왕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다스리는 것뿐이야" 하며 예수님을 폄하하였다.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실 때에도,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을 때에도 예수님은 소문을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소문이 나지 않을 리 없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

 

 예수님이 이적을 베푼 일에 대하여 소문을 내지 못하도록 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기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것이며, 작게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기적은 사람을 쉽게 매료되게 하지만, 자칫 기적에 의존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경계하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 이유에 대해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37~38절)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시는 이유는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긍휼, 자비의 표현이었다. 기적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지만, 그 여리고 약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강조하신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동안에 이 긍휼과 자비, 사랑을 베푸는 삶이 어떠한 삶인지 충분히 직접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계신 것이다.

 

 내가 뭐 대단히 도덕적이고 준법정신이 투철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에서, 학교 주변에서 만큼은 가급적 차가 거의 없는 횡단보도조차도 신호를 지켜 건너려 하고, 길에 떨어진 휴지가 보이면 줍기도 한다. 그것은 내가 그러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이고, 가르치는 사람은 본을 보임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직접 사랑과 긍휼, 자비하심의 본을 보이셨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나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써야 하지 않을까? 학교에서 잘하는 아이 보다는 서툴어도 배운 대로 해 보려고 애쓰는 아이가 더 이쁘다. 오히려 잘 하는 아이는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내버려 두어도 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못하지만 하려고 애쓰는 아이는 한 없이 이쁘기만 하다. 그래서 더 신경 쓰고, 더 도와주게 된다. 아마도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은 이러한 말이 아닐런지.

 

 그렇다면 나 역시 하나님 앞에서 다소 서툴고, 모자라고, 때론 실패할지라도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내게 말씀대로 '완벽하게' 사는 삶을 요구하시기보다는 '말씀에 순종하여'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더 이쁘게 보시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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