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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예수님의 치밀하고 정교한 사랑 (마8:23~34)

by 멧풀다솜 2023.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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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

 무리들이 에워싸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오르신다.(18절) 배 위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배는 사나운 풍랑을 만나게 된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위급한 상황이니 구원해 달라 요청한다. 이 장면은 재미있는 장면이다.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도 있었고 다른 제자들도 어부 출신들이 제법 있다. 그런 그들이 목수 출신 예수님에게 사나운 풍랑의 위기에서 구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27절) 그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부르심에 응답했고, 몇 가지 이적을 통해 보통 사람은 아니란 것을 알았을 뿐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라면 무언가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깨웠다.

 

 예수님은 잠에서 깨자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잔잔케 하시곤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어째서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막4:40)

 마태복음에는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마가복음에는 '믿음이 없음' 으로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로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으로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것을 보고는 놀라워하며 말한다.

이분이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이분 말에 순종하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의 여러 이적들도 보았고, 눈앞에서 말씀으로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하는 말이 "이분이 대체 누구이기에..." 이다.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은 있었기에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 도와달라 요청하였지만,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고 안심하는 믿음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파도를 만나고 풍랑을 만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상황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본다. 예수님이 주무신다면, 사나운 파도나 거친 바람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나를 어찌하지 못한다. 예수님도 아무 걱정 없이 주무시는데 내가 혼자 안달복달 해 봐야 달라질 것은 없다.

 

 나는 예수님을 바라볼까? 아니면 예수님을 깨울까? 아마도 나는 어찌하든 내 힘을 그 파도를 헤치려고 안간힘을 쓰는 쪽에 가까울지도...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별 것 아닐 것이라 안심하는 믿음도 없거니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믿음도 없고 그저 '아니 도대체 이런 파도 속에서 그냥 저렇게 주무시기만 하면 어쩌자는 거야?' 하며 투덜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제자들도 비슷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깨웠을 듯싶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모두 믿음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그저 그런 하소연, 혹은 '하나님! 아~ 쫌! 어떻게 좀 해 줘 봐요!' 하며 투덜거리는 투정일 수 있다. 믿음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기에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이다. 그런 기도가 내게 있는지. 나의 기도에 그런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는지 돌아보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있어야겠다.

 

군대귀신을 물리치신 예수님

 가다라 지방에 도착한 예수님의 일행은 마을 어귀에서 귀신 들린 자 두 사람을 마주친다.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사람을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도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밤낮 구분 없이 무덤 사이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신의 몸을 자해하며 살고 있었다. (막5:4~5)

 

  이 귀신 들린 사람-정확히 말하면 이 사람 속에 들어간 귀신들이 멀리서부터 예수님을 보더니 달려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간청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벌써 오셨습니까? 우리가 당신께 무슨 해를 가했습니까?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우리부터 먼저 괴롭히려고 오신 것입니까?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기 있는 저 돼지 떼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29절, 31절 의역)

 예수님이 이 귀신들의 요청을 허락하자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고, 돼지 떼는 갑자기 비탈길을 내리 달려 바다에 들어가 물에 빠져 몰사하였다. 이에 돼지 떼를 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마을로 달아나며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와서 자신들의 마을에서 떠나시기를 요청한다.

 

 이 사건은 참 이상하다. 왜 예수님은 귀신을 그냥 쫓아내지 않으셨을까? 왜 이 사람들의 생업수단인 돼지를 몰살시키는 방법을 택하셨을까?  돼지는 모세의 율법에 의해 부정한 짐승이라 먹을 수 없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레11:7~8)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가까이하는 것조차 꺼려했다. 따라서 본문에 등장하는 이 돼지들은 아마도 갈릴리 호수 동편 이방인들의 지역에서 방목하던 돼지로 추정된다. 이 돼지들은 헬라 지역의 데카폴리스 신전에 바쳐졌다가 식용으로 팔리는 용도로 사용되는 돼지들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이방신전에 바쳐질 돼지들을 몰살시키신 것일까?

 

 예수님이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귀신의 요청은 들으시고 돼지나 돼지를 치는 이방인은 불쌍히 여기지 않으신 걸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귀신의 말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군대귀신은 예수님에게 "때가 이르기 전에" 라고 하였다. 즉 아직은 귀신들의 심판을 위해 정해진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가복음 5장과 누가복음 8장에서는 이 귀신의 이름을 예수님이 물으시니 '군대'라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군대'로 번역된 헬라어는 '레기온' 이다. 레기온은 로마 군대의 병력 단위로 여단급 규모를 말한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이 무려 6,000 정도 되는 것이다. 이 귀신들은 자신들이 머물 곳을 찾아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무려 6천이나 되는 귀신들이! 아마도 예수님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돼지떼를 선택하셨고, 귀신이 꺼려하는 물로 돼지와 함께 귀신들을 빠트리신 것이 아닐까?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눅11:24)

 

 또 특이한 점이 있다.

 직전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귀신들을 쫓아내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쌌다. 몇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 라고 말씀하셨다.(마 8:18) 다시 말해 예수님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이적을 행하다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구하기 위해 거친 풍랑을 뚫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오신 것이다.

 

 귀신 들린 이 사람은 오랫동안 군대 귀신에게 시달려 옷도 입자 않고 무덤들 속에서 살며 온몸이 자해로 상처투성이가 되고 , 아마도 그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어 마치 한 마리 괴수와도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이방인'을 구하기 위해 갈리리 호수를 배를 타고 건너오셨고, 이 사람을 고치신 후에 다시 배를 타고 본 동네로 돌아가셨다. (마9:1)

 

 예수님에 의해 구원을 받은 이 두 사람은 깨끗이 몸단장을 하고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눅8:35)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떠나실 때 함께 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받아주지 않으시고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돌아가라. 가서 하나님이 너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고, 너를 불쌍히 여기셨는 가를 네 가족과 사람들에게 알려라 (막5:19)

 예수님에 의해 놀라운 구원을 받은 이 두 사람은 결국 데카폴리스(데가볼리)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첫 이방인이 되었다. (막5:20)

 

 예수님의 행보는 언제나 목적이 분명하셨다. 그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도우신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셨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귀신 들린 이 두 사람을 위해 풍랑을 헤치고 건너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이방인을 구원하시고, 귀신 들려 괴롭게 되었던 두 사람을 온전케 하신 기쁨보다는 자신들의 손해로 인해 마을에서 떠나기를 간구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은 참으로 치밀하고 정교하다. 이 사랑이 나를 살게 하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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