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QT)

새 술은 새 부대에 (마9:14~26)

by 멧풀다솜 2023. 2. 8.
728x90

 

 바리새인들이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하는 예수님을 비난한 것에 대해 예수님은 호세아서를 인용하여 하나님의 긍휼 하심과 자비하심을 먼저 배워야 하며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임을 말씀하셨다. 이 대답을 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였다.

우리도 금식하고, 바리새인들도 금식을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하였다. 공식적으로 금식을 행해야 하는 날은 초막절 닷새 전 7월 10일에 행해지던 '속죄일' 이었지만(레23:26~32), 죗값을 치르거나 슬픔, 혹은 기도를 뒷받침하기 위해 금식을 하기도 하였다.예루살렘이 파괴된 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일을 정하여 놓고 금식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슥7:3)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보를 보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분명 자신들의 선생님인 요한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이 곧 오시리라 예언된 메시아 같기는 한데, 낙타 털옷을 입고 석청을 먹으며 선지자스런(?) 모습의 요한과 달리 예수님은 웃고, 마시며, 금식도 하지 않는다. 요한의 제자들 보기에 예수님보다는 오히려 자기들의 스승인 요한이 더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보다 늦게 등장하여 주목을 받는 예수님에 대해 묘한 경쟁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요3:26) 

 

 이에 예수님의 대답은 '결혼식장에서 신랑과 함께 있는데 금식하며 슬퍼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대답으로 말씀을 이어가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신랑'은 물론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이 오셨으니 슬퍼하고 금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금식을 계속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이미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금요일과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행13:1~3), 장로들을 세우기에 앞서(행14:23) 등 특별한 경우나 기도와 연관 지어 금식을 하기도 하였다.

 

 낡은 옷을 수선하는데 새 천 조각(생베)을 붙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천 조각이 옷을 당기게 되어 낡은 옷이 더 해어지기 때문이다. 새 포도주 역시 낡은 가죽부대(wineskin)가 아닌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그래야 새 포도주도 보전하고, 가죽 부대도 보전이 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새 부대'가 되어야 한다. 이전의 율법적 관습과 관행을 벗고 새로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였어도 여전히 율법적 관습과 관행에 매여 있다면 복음이 온전한 힘을 발하지 못하게 될 뿐이다.

 

 한국 교회만의 독특한 모습 가운데 하나는 새벽기도이다. 이는 전통적인 기복신앙의 형태가 기독교적 형태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 하여 새벽기도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의 대상만 '천지신명'에서 '하나님'으로 바뀐 기도의 모습이라면 그것은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는 것과 다름없다. 성경공부나 묵상 역시도 지적 호기심을 채우거나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어 자랑하기 위함이나 자신의 경건함을 나타내려는 모습이라면 역시 이것도 새 술을 헌 부대에 담는 형태이다.

 

  나는 묵상을 할 때 성경공부처럼 하는 경향이 있다. 말씀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쉽게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말씀이 주는 삶의 지침을 얻기보다는 성경에 대한 지적 탐구에 몰입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건 묵상의 본질이 아니다. 성경공부는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면 묵상의 경우는 말씀이 주는 삶의 지침을 얻고 이를 실천하는 데 있다. 그러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 묵상을 성경공부처럼 하고 있는 나는 어쩌면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넣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급히 찾아왔다. 자신의 딸이 죽었지만 예수님이 손을 얹어주신다면 살아날 것이라면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청한다. 회당장은 유대 공동체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으로 회당 장로들 가운데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다고 보여진다. 예수님은 종종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그때마다 유대인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비판하는 발언을 많이 하셨다. 때문에 회당장 야이로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그리 달가운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외동딸의 죽음 앞에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소문을 들은 야이로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은 흔쾌히 야이로의 부탁을 들으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신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을 따라 함께 길을 나선다. 길은 예수님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 예수님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혼잡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며 말씀하신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막5:30)

 제자들은 어이가 없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서로의 몸이 부딪히는 상황에서 누가 옷에 손을 대었냐고 물으시다니.... 하지만 한 사람만은 두려워하였다. 예수님의 질문이 자신을 향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12년 동안 하혈이 멈추지 않는 병을 앓고 있던 여인. 율법대로라면 이 여인은 '부정한' 사람이었고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자신과 접촉하는 사람도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집 안에 있어야 한다. 여인은 예수님 앞에 두려움에 떨며 자신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란 생각에 그랬다고 고백하며 엎드렸다. 그러자 예수님은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하신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한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말고 평안히 가거라. 병이 나아 건강할 것이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자 이미 야이로의 딸이 죽어 많은 사람들이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장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필요 없으니 그만 나가라. 이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비웃었다. 죽은 사람을 보고 잔다니...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내어 보내시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가서 야이로의 딸의 손을 잡으셨다. 그리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막5:37~41) 그러자 기적과도 같이 야이로의 딸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단단히 경계하셨지만(막5:43)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26절)

 

 손만 얹어주어도 살 것이라 믿은 야이로,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으리라 믿었던 여인, 하나같이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대로 반응하고 행동하셨다.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 받는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외치는 기도보다는 하나님이 어떻게 도와주실지, 무엇을 도와주실지를 간절히 바라고 구하는 기도가 믿음의 기도일까? 확신할 순 없지만 그저 막연하게 '주님 도와주세요' 하고 외치는 기도에는 간절함도, 절박함도 없고 믿음도 없다. 내가 생각한 방법, 내가 생각한 모습일지라도 그 속에 '오직 예수님만이' 도와주실 수 있을 것이란 절박함으로 내 문제를 털어놓고 구하는 것이 믿음의 기도이며 새 술을 새 부대에 넣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