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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산헤드린 재판 (마 26:57~75)

by 멧풀다솜 2019.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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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헤드린 재판

(마 26:57~75)


 개인적으로는 사도신경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구절이 있다. "거룩한 공회"가 그것이다.

 '공회', 또는 '의회'로 번역되곤 하는 이것은 '산헤드린'이라 불리우는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기구이다. (물론, 사도신경에서의 '공회'는 '산헤드린'을 말하는 것이 아닌 '보편적 교회' 또는 '공 교회'를 의미하기는 하지만 어감상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로마의 식민지 정책 중 하나는 반란죄 등의 경우가 아니라면 자치적인 종교와 재판을 허용했기에 당시 산헤드린은 유대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구였다.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잡히신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공관으로 끌려갔다. 산헤드린 재판에 서시게 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시각은 새벽이었기에 산헤드린은 열릴 수 없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산헤드린은 낮에 진행되어야 하며, 피고를 변호할 증인을 확보해야만 한다. 또한 명절기간에는 열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사형은 재판 당일에 선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애초에 민란을 두려워하여 유월절을 피해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예수님은 유월절에 잡히셨다. 규정대로 유월절을 피하고 변호할 증인을 구한 뒤 낮에 재판을 하려 한다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민중들의 동요가 걱정되었다.


 결국 그들은 모든 절차를 압축하여 새벽에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하기로 한다.

 거짓 증거들과 증인들을 세워 예수님을 심문하지만 예수님은 시종일관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그들이 이미 답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기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기에 애써 변호하거나 변명하지 않으신다.


 이런 예수님의 침묵에 오히려 몸이 달은 것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거짓 증거와 증인이기에 사형을 선고할 증거가 약했다. 그들이 찾은 그나마 유일한 증거는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부분이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에게 어째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며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맹세하여 대답하라 요구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님은 침묵을 깨고 대답하신다.

 "네가 말했다. 하지만 이후에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는 것과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들이 보게 될 것이다"


 드디어 빌미를 잡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하고 사영을 언도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조롱한다.


 한편 베드로는 베드로는 멀찌감치 바깥 뜰에서 다른 제자들이 도망간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베드로를 알아본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와서 물었다.

 "당신,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나요?"

 "뭔소리요? 무슨말인지 모르겠네"

 베드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고는 그자리를 피해 대문 근처로 갔다. 그런데 다른 여종이 또 베드로를 보고는 묻는다.

 "어? 이사람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네"

 "거참~! 아니라니까! 맹세코 나는 아니요!"

 그러자 다른 사람이 또 와서 말한다.

 "맞네! 분명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네! 말투를 보니 딱 알겠어!"

 그러자 베드로는 강하게 부인한다.

 "거 아니라니까 왜들 그러시오! 내가 거짓말을 하는거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거요!"

 베드로가 마지막으로 강하게 부인할 때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렸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닭 울기 전 세번 모른다 할 것이라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크게 통곡한다.


 보통 침묵은 암묵적 동의로 여겨지곤 한다. 그래서 나를 공격하는 말들에 대해 목에 힘을 주어 변명하거나 변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때로 침묵은 큰 힘을 내기도 한다. 암묵적 동의가 아닌 가장 큰 저항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목소리를 높여 공격하는 사람에 대해 같이 목소리를 높이게 되면 똑같은 사람이 되거나 목소리가 뒤엉켜 그저 다투는 모양새만 유발하게 된다. 하지만 침묵을 하게 되면 공격자는 힘을 잃는다. 공격자의 목소리만 울려퍼지고, 침묵을 유지하는 사람은 평온해진다. 공격자는 자신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어 더욱 목소리를 높이게 되고, 오히려 치명적 실수들을 쏟아놓게 된다.


 예수님의 침묵은 제사장과 장로들이 억지로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침묵으로 대답하신 예수님은 오히려 아무 죄가 없음이 드러났다.


 몇년전 교실에 누군가 내 욕을 잔뜩 써 놓은 일이 있었다. 아이들도 당황했고, 다른 동학년 선생님들도 당황했다. 누군지 찾으려 하였지만 오히려 나는 그럴 수 있다며 그냥 넘어가려 하였다. 그러자 반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화 안나요? 왜 가만히 있어요?"

 나는 그 아이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없는 자리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 했다. 어떻게 불만이 없을 수 있겠니? 물론 나도 사람이라 화는 나지만 그뿐이야. 애써 누구인지 찾아봤자 나는 앞으로 그 학생을 고운 시선으로 보지 못할 것이고, 그 학생은 나를 볼 때마다 마음이 어떻겠냐? 잘못을 한 사람은 정작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있을테고,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그 학생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이 될수도 있는거야"


 옆반 선생님이 난리가 났었다. 우연찮게 아이들 사이에서 옆반 누군가의 이름이 거론되었고, 그 선생님은 자기반 아이를 중상모략했다며 반으로 내가 직접 와서 해명하고 사과하라 하였다. 다른 동학년 선생님들이 너무한다 하였지만 난 요구대로 그반에 가서 어찌 되었든 우리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오해를 받게 해 미안하다며 사과하였다.


 그 선생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본인이 이리 저리 뛰며 기어코 누가 그랬는지를 찾아내었다. 우리반 남학생이었음을 밝혀낸 그 선생님은 기세 등등하게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렸지만, 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나중에 우리반 남학생 한명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옆반 남학생과 함께 그랬다는 것이 우연히 밝혀졌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참 대처를 잘했다 싶다. 만일 그 선생님과 싸우자 들었다면 결국 그 피해는 아이들 몫이 되었을 것이고, 서로 상처만 입히고 동학년 사이가 애매해지는 결과를 나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의 동학년 선생님들과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지만, 비겁한 침묵도 있지만, 때론 침묵하는 것이 좋을때도 있다. 언제 침묵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베드로처럼 애서 자신을 변호하려다가 오히려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예수님이 마지막에 침묵하셨다면 예수님 스스로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것 처럼 되지 않도록. 침묵할 때 침묵할 줄 알고, 입을 열어야 할 때 정확하게 입을 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살아야겠다.


 이번주...특히 그렇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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