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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빌라도의 재판 (마 27:11~26)

by 멧풀다솜 2019.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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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의 재판

(마 27:11~26)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사형을 언도받기 위해 유대의 총독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를 찾았다.

 사형에 관한 권한이 로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모독으로는 로마법에 의해 사형을 언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짜낸 예수님의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이스라엘에서 황제가 임명하지 않은 "왕"은 반란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명분이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으나 예수님은 산헤드린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산헤드린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케 하여 예수님의 발언을 억지로 끌어낼 수 있었으나,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정치적 죄목만을 따지기에 예수님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저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였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어차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야 한다. 예수님의 침묵은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라 말없이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순종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한 빌라도는 유월절 특사를 이용하기로 한다.

 유대의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 한 사람을 특별사면 할 수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죄 없는 예수님을 놓아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군중들의 대답은 "바라바를 놓아주시오"였다.

 바라바는 "유명한 죄수"로 언급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열심당원의 한 사람으로 폭동과 폭력을 통해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려 한 혁명가로 알려져있다.

 바라바가 누구든간에,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바라바를 선택한 빌라도의 의도는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빌라도는 도대체 예수라는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군중에게 물었으나 군중은 그저 십자가에 못박고 바라바를 풀어주라는 소리만을 외쳐댔다.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바라바를 요구하게 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하였기 때문이다. (20절)

 

 불과 얼마전까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은 어느새 종교지도자들의 말에 현혹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치는 군중으로 돌변해 있었다.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지도자의 부패와 타락을 단지 지도자의 문제만으로 볼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맹목적으로 스스로의 판단 없이 종교지도자의 말을 들은 백성들 또한 지도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예수님과 같은, 모세와 같은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양성한 책임은 그래서 보통의 그리스도인들(군중들)에게도 있다. 맹목적으로 종교지도자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빌라도는 최후의 수단을 택한다.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는 죄에 대해 나는 감당하지 않을테니 너희들이 감당하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군중들은 더욱 크게 소리지르며 그 피의 대가와 죄를 자신들의 자손에게까지 돌리라 대답한다.


 결국 빌라도는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게된다.


 사실, 빌라도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빌라도의 책임도 분명 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함을 알았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에서 온 것도 알았다(18절).


 나름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노력하였으나, 결정적으로 그에게는 바라바와 예수 중 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재판에 의해 무죄, 혹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아님을 선포할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군중들이 두려웠고, 그 두려움은 결국 책임회피를 통해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만큼 실천하고자 하는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 책임을 회피한다 하여 그것으로 끝낼수는 없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그럴 때가 있다.

 분명히 잘못이 없거나, 그리 큰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위 본을 보인다는 명분으로 과도하게 학생을 질책하는 경우도 있고, 명백하게 잘못한 학생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유로, 혹은 내가 피곤하기 싫어 눈을 감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공의를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 거창하게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옳은지 확인하고, 기도하고,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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