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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QT)

12제자를 세우시다 (막 3:1~19)

by 멧풀다솜 2020.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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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제자를 세우시다

(막 3:1~19)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는데 그들의 관심은 과연 그 사람이 나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예수님이었기에, 그들도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는가의 여부고, 그동안의 예수님의 행태를 보았을 때 분명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치실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것은 훌륭한 고발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안 예수님은 병자를 무리들 가운데 서게 하신 뒤 물으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할까? 아니면 악을 행할까?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떤 것이 옳은 일일까?"

 

 사람들은 잠잠했다.

 할 말이 없다.

 예수님은 결국 병자를 고치셨다.

 그러나 예수님을 고발하려 했던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예수님의 말 때문에 안식일을 범한 죄로 고발을 하지 못하니 다른 방법을 쓰기 위해 궁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다.

 하나님이 율법 가운데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임을, 율법의 본질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질보다는 언제나 '행위'에 주목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을 얼마나 쉽게 그 사람의 '행위'로 판단하는가.

 물론, 의도가 옳다 하여 행위를 정당화 시킬 순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의도가 행위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약한 육신 때문에, 악한 육신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는 그 마음을 보시는 것이리라.

 마음으로 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사람들은 안타까움이 없다.

 그러나 마음이 정직한데 행위가 옳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예수님이 세우신 12제자들은 바리새인도, 서기관도, 제사장 출신도 아니었다.

 어부, 세리, 촌부 등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지만,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인정받을만한 소위 '스펙'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은 심령의 갈급함,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제자들을 불러 세우신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학생들을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다.

 급하게 온라인으로 연락처를 찾아 정리하고, 학부모 밴드에 학부모를 초대하고, 집에서 할 수 있는 과제들을 부여하고는 있지만,

 확실히 온라인으로 전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지라 참여율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화가 나기도 한다.

 "아니, 이런 때에 담임선생님이 이렇게라도 연락하고 하면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참으로 편하게도 판단했다.

 온라인 접속이 쉽지 않을수도, 처음 해보는 앱이 어설퍼서, 이런 저런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수 있는데 내가 함부로 판단한 것은 아닌가?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반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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