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QT)548

봄날의 사랑 (아 2:8~17) 봄날의 사랑(아 2:8~17) 아가서를 묵상하면서는, 이 뛰어난 문학적 표현과 아름다운 내용들을 현대적으로 의역하여 시로 다시 써 보고 싶은 욕심이 든다. ^^ 아가서는 중의적(重義的)표현의 정수와도 같다. 잠언이나 전도서도 그렇지만 특히나 아가서를 읽다보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은 그 지혜가 너무나도 극명하게 나타나는 듯 하다. 아가서는 남여의 사랑을 아름답고도 노골적(?)으로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깨닫는 좋은 거울은 둘이면서 하나인 부부관계이며, 조건 없이 사랑하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그래서 부부의 사랑에 대해,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지에 대해 묵상하기에 더 없이 좋은 이.. 2019. 4. 22.
나의 사랑하는 자야 (아 1:1~2:7) 나의 사랑하는 자야(아 1:1~2:7) * '아가'서는 '우아한 노래'이며 '노래중의 노래(song of song)', 또는 '솔로몬의 노래(song of solomon)'이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을 노래한 시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을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의 사랑으로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성경이다.========================================= 당신에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쏟아진 향수와도 같이 퍼져 모든 처녀들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왕이시여, 당신을 기뻐하고 즐거워 합니다. 여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나를 당신의 침실로 데려가 주세요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고 진합니다 .. 2019. 4. 22.
빌라도의 재판 (마 27:11~26) 빌라도의 재판(마 27:11~26)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사형을 언도받기 위해 유대의 총독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를 찾았다. 사형에 관한 권한이 로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모독으로는 로마법에 의해 사형을 언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짜낸 예수님의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이스라엘에서 황제가 임명하지 않은 "왕"은 반란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명분이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으나 예수님은 산헤드린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산헤드린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케 하여 예수님의 발언을 억지로 끌어낼 수 있었으나,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정치적 죄목만을 따지기에 예수님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저들.. 2019. 4. 17.
산헤드린 재판 (마 26:57~75) 산헤드린 재판 (마 26:57~75) 개인적으로는 사도신경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구절이 있다. "거룩한 공회"가 그것이다. '공회', 또는 '의회'로 번역되곤 하는 이것은 '산헤드린'이라 불리우는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기구이다. (물론, 사도신경에서의 '공회'는 '산헤드린'을 말하는 것이 아닌 '보편적 교회' 또는 '공 교회'를 의미하기는 하지만 어감상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로마의 식민지 정책 중 하나는 반란죄 등의 경우가 아니라면 자치적인 종교와 재판을 허용했기에 당시 산헤드린은 유대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구였다.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잡히신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공관으로 끌려갔다. 산헤드린 재판에 서시게 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시각은 새벽이었기에 산헤드린은 열릴 수 없었다. 유대 전통.. 2019. 4. 15.
십자가의 준비 (마 26:1~16) 십자가의 준비 (마 26:1~16) 드디어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해온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신다. 이틀 뒤 유월절에 넘겨져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게 될 것이라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공관에서는 제사장과 장로들이 모여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벌어졌다. 그들은 최대한 조용하고 은밀하게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고, 유월절 기간에는 민란의 염려가 있으니 유월절을 피해 죽이자고 계획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대로 예수님을 죽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의해 모든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이 피하려고 했던 유월절에 잡히시게 된다. 문둥병에 걸렸던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이 머물고 계실 때, 한 여자가 향유 한병을 .. 2019. 4. 12.
지극히 작은자에게 (마 25:31~46) 지극히 작은자에게(마 25:31~46)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사람들을 의인과 죄인으로 구분하신다. 양과 염소로 비유를 하시지만 비유치고는 매우 직설적인 화법으로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은 의인을 향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가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을 때 옷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 돌보고 감옥에 갇혔을 때 문안하였다 칭찬하신다. 의인들은 대답하기를 언제 그랬냐고 대답하지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하나님께 한 것이라 말씀하신다. 반대로 죄인들에게도 갇은 기준을 적용하시며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질책하시고, 죄인들은 그런적이 없다 대답한다. 하지만 역시나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돌보지 않은 것이 하나님을 .. 2019. 4. 11.
달란트 비유 (마 25:14~30) 달란트 비유 (마 25:14~30)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을 대비하여 깨어있으라는 예수님의 비유 중 달란트 비유이다. 주인이 먼 나라로 가며 종들에게 각각 달란트를 맡겼다. 어떤이에게는 5달란트, 어떤이에게는 2달란트, 어떤이에게는 1달란트를 맡겼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드라크마인데 1달란트는 6,000 드라크마에 해당하니 1달란트만 해도 대략 15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큰 돈을 종들에게 맡긴 것이다. 종들은 각각 받은 달란트를 이용해서 장사를 하여 두배의 이윤을 남겼다가 주인이 돌아와 정산할 때 보고하고 칭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더 큰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었는데 주인은 그 종을 향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꾸짖으며.. 2019. 4. 10.
열처녀 비유 (마 25:1~13) 열처녀 비유(마 25:1~13) 예수님이 오실 때가 언제일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 깨어서 준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제 본문이었던 마태복음 24장에서 "무익한 종"으로 시작된다. 무익한 종은 자신의 할 일을 다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는데 그 이유는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충성된 종은 주인이 언제 올 지 모르니 늘 자신이 할 바를 다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깨어있으라는 의미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모여 예수님이 오실날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그런 어떤 단체가 있었다 ^^;;) 자신이 할 바를 다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세인 것이다. 오늘 열처녀 비유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은 양가 부모 사이에 정혼이 이루어진 뒤 신.. 2019. 4. 9.
깨어있으라 (마 24:36~51) 깨어 있으라(마 24:36~51)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심지어 예수님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노아의 홍수 때 사람들은 노아가 배에 들어가기 전까지 일상생활을 살았다. 갑자기 그렇게 큰 비가 내려 세상이 물에 잠길 것이라고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예수님의 재림도 이와 같이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이 밭에 있다가, 멧돌을 갈다가,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버림을 받게 된다. 두 사람이 하고 있던 일에는 차이가 없다. 주인이 하인에게 일을 시켜두고 떠났다가 다시 왔을 때, 시킨대로 열심히 일하고 있던 종은 주인의 칭찬을 받고 더 큰 일을 맡게 되겠지만, 주인이 언제 올 지 몰라 자기 마음껏 살던 종은 쫓겨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 2019. 4. 8.
만일 우리가...(마 23:29~39) 만일 우리가...(마 23:29~39)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일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의롭고 경건한 척 하며 과거 이스라엘이 선지자들을 죽인 것에 대해 "만일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 말이 오히려 자신들이 선지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말씀하시며 결코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경고하신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조상들의 죄를 묻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 조상들의 죄를 보고도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그 위선적이고도 가식적인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낼 것이고, 그 제자들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때.. 2019. 4. 5.
화 있을진저 (마 23:13~28) 화 있을진저(마 23:13~28)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 외치신다. 이 표현을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에라이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들아!" 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님이 이처럼 강하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질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로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며 많은 사람들을 모았으나, 정작 그들의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기는 커녕 멀어지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맹인이 길을 인도하는 꼴이라 말씀하신다. 성전을 두고 하는 맹세보다 금을 두고 하는 맹세를 더 강요하고, 제단을 두고 맹세하기 보다 제물을 두고 맹세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완전하심 보다는 금과 제물.. 2019. 4. 4.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 (마 23:1~12)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마 23:1~12) 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학자와의 논쟁을 마치신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적나라하게 비판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모세가 된 것 처럼 생각한다. 너희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행하고 지켜라.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본받을게 없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놈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는 놈들이다. 그놈들이 하는 짓은 다 다른 사람에게 잘난체 하려는 것들이다. 그래서 말씀상자를 크게 만들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려 거룩한 척을 한다.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길을 다니면서 인사 받는 걸 좋아하고, 선생(랍비)이라 .. 2019. 4. 3.
논쟁 (마 22:34~46) 논쟁(마 22:34~46)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에서의 난동(?)사건 이후,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때 소위 말하는 율법(하나님의 말씀)의 전문가들이 총 동원되어 예수님과 논쟁을 벌였다. 첫번째는 제사장과 장로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삼아 사람들의 지지를 무너뜨리려 하였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반문에 대해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치를 떨 뿐이었다. 두번째는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세금에 관해 질문하였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상태를 이용하여 세금을 내라고 하든, 내지 말라고 하든 정치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공격할 빌미를 얻고자 했으나 "가이사(카이사르)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세번째로 사두개인들은.. 2019. 4. 2.
알지 못하여 오해하는도다 (마 22:23~32) 알지 못하여 오해하는도다(마 22:23~32)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인다. 사두개인들은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 제사장의 역할을 가장 존중하였으며, 예수님시대 제사장에게 충성하던 귀족 계층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기록된 토라(모세오경)"만을 인정하고, 모세오경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인 "구전적 토라"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사두개인들의 관점 때문에 그들은 부활이 없다 믿었다. 모세오경에 부활에 관한 직접적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처럼 귀족계층도 아니고 정치적 권력도 없었지만 백성들 사이의 신망이나 지지가 두터웠던 바리새인들은 전통적 해석에 따라 부활이 있다고 믿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게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예를 들어 부활에 대해 논쟁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따.. 2019. 4. 1.
포도원 비유 (마 21:33~46) 포도원 비유(마 21:33~46)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세례요한의 외침을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을 꾸짖으신 예수님은 이어 포도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겨두고 다른 나라에 갔다가 열매를 거둘 즈음해서 하인들을 보내 열매를 받아오게 하였다. 하지만 농부들은 그 종들을 때리고 죽였다. 주인이 다시 하인들을 더 많이 보냈지만 농부들은 여전히 종들을 죽이거나 때렸다. 주인이 이번에는 상속자인 아들을 보냈다. 농부들이 자기 아들은 존중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농부들은 오히려 아들을 죽이면 포도밭이 영원히 자기들의 것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아들마저 죽여버렸다. 이제 주인이 어떻게 할 것이가를 예수님이 묻자 제사장과 장로들은 그 농부들을 죽.. 2019. 3. 29.
728x90